내가 어렸을 때부터 모부님은 강조하셨다. “우리는 아들과 딸을 차별한 적이 없다”. 그 말을 할 때는 유독 진지한 표정과 말투셨다. 말의 내용은 참 좋은 거였지만 뭔가 답답했다. 왜일까? 어느 날 내가 어떤 일로 화가 나고 서운해서 마구 토로했는데, 저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저 말은 실제로 나라는 사람이 차별을 느꼈는지, 어떤지에 대해 먼저 묻거나 궁금해하는 여백이 없다는 걸. 왜냐면 ‘차별하지 않은/않을’ 사람의 의지와 확신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차별은 없어야 하고, 부모라는 주체는 결코 그걸 하지 않으며, 결국 그건 없다는 선언. 

누가 말하고 있느냐는 중요하다. 예를 생각해보자. <우리 지역은 청소년친화도시다!>는 말은 누가 어떻게 할 때 그 내용이 실현될까. 청소년이 지역사회에서 평등한 시민으로 차별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려면 아주 아주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흔하게는 누가 말하고 있을까. 부모, 교사, 공무원, 지역 어른 등 비청소년들은 저 말에 손쉽게 동의하고 박수를 보내고, ‘장’들은 테이프를 끊고, 선언할 수 있다. 그 장면 앞에서 청소년은 무슨 반응을 하게 될까.

페미니즘은 차별받는 자, 억압받는 자의 시선에서 말해야 한다는 철학과 행동을 가리킨다. 주변부, 변방의 목소리가 살아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도리어 중심부란 무엇이었는지 묻게 될 거다. 세상엔 지켜져야 할 이성적인 규범, 합리적인 전통이 있다고 믿어왔는데 그것은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기쁨과 혜택을 주었었나? 공평하게 적용되고 정의로웠나? 
그러나 세상을 통치했던 기준들을 고찰하면 (여성이 아닌) 남성의 생각, (유색인이 아닌) 백인의 기준, (장애인 아닌) 비장애인의 신체경험, (어린이가 아닌) 성인의 자유, 그리고 (다양한 성애자가 아닌) 헤테로 성애자인 이들에게 익숙하고 유리한 기준이었다. 그 외의 사람은 타인으로, 소수자로, 이상한 사람으로 배척되면서 세워진 ‘일반적인’이라는 기준. 

최근의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은 사회문화적으로 큰 반응을 낳고 있다. 2-3년 전 온라인 공간, SNS에서 모이고 떠들고 들끓기 시작한 여성의 말들은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 페미니즘이 싫어 IS에 지원하러 간다는 어느 남자 고등학생의 글을 보고 주간지에 칼럼 쓰는 남성 필자는 ‘IS보다 페미니즘이 더 나쁘다’고 썼다. 페미니즘에 대한 지독한 오독과 폄훼에 맞서서 해쉬태그 #나는_페미니스트이다 페밍아웃 릴레이가 이어졌다. 작년 5월 17일 강남역 10번출구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포스트잇 추모물결 #나는_우연히_살아남았다가 이어졌다. #이것이_여성의_자취방이다에서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어떤 침해와 위험, 위축을 느끼며 사는지에 대한 고발 릴레이였다. 

페미니즘은 차별받는 자, 억압받는 자의 시선에서 말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차별받는 자’들의 말하기에 대한 반응은 어땠을까. 커다란 사회적 파장이 뒤따른 데에는 그만큼 ‘일반적인 사회’가 그것을 잘 몰랐거나 모른체 해왔다는 걸 반증한다. 또 하나는 고집스런 부정과 배척이다. “나를 왜 가해자로 모느냐?” “너네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내가 보기엔 아닌데. 너 가짜로 말하는 거지? 근거 가져와봐” “지금은 여성상위 시대잖아?!” “왜 그렇게 과격하게 말해? 폭력적이면 안 되지” “화합해도 부족할 시간에 갈등을 조장하는 거야?” 

여성들이 차별받는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차별은 없다, 조작한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말일 뿐이라고 했다.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이 그에 맞서 싸우니 “저건 진짜 여자가 아니야 (남자가 여자흉내 낸 거다)” 하다가 점차 “저건 진짜 페미니즘이 아니야, 가짜 페미니즘이야” 라고 했다. 또다시 떠들고 외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분리, 배척, 낙인하려 한다. ‘프로불편러’라고 이름붙이고 비난하려 하지만, 정작 고집스럽게 그 목소리들을 불편해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마음대로 행동하고, 마음껏 말하고, 다른 이들은 나를 싫어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잠자코 따라오기를 바라는 이들은 누구일까.     

촛불시위로 일구어낸 한국 정치, 민주주의사의 큰 변화 밑에서도 누가 말할까? 의 문제는 여전히 흐른다. 문재인씨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할 차별금지법은 결코 제정하지 않겠다고 보수 기독교계에게 약속했다. 누가 겪는 차별을 누가 누구와 협상하고 있는가? 문재인씨의 연단 아래서는 성소수자인인 여성들이 ‘나는 한 몸인데 여성으로서의 권리는 보장되고 성소수자로서는 권리가 없는가? 내 권리가 반으로 갈라지는가?“ 시위했지만 행사에 방해가 된다고 저지되었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정부는 가임기 여성이 어느 동네에 몇 명이 사는지 지도를 만들고, 여성들이 눈을 낮추어 하향 결혼할 수 있게 은밀히 유도하자는 국책 연구기관의 보고서가 발행된다. 일상에서 만나는 비혼 여성이나 노키드 기혼여성에게 저출산이 문제인데 나라를 생각하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다시 묻고 싶어진다. 저출생은 누구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그런데 왜 이미 어떤 사람이, 가령 장애가 있는 10대 여성이 임신하면 환영하지 않는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경력이 단절되지 않고 일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아이의 아빠와 엄마에게 공히 양육휴직을 권하고 남성들에게도 양육실전을 가르치지 않을까?
 
누가 말하고 있는가? 의 문제의식은 우리동네에서도, 내 주변 일상에서도 유효하다. 최근에 페미니즘을 접하고, 관련된 책과 영화를 찾아서 읽고 보고 배우려고 하는 노력도 주변에서 많이 본다. 그러나 “내가 책을 읽어봐서 아는데” “그러니까 페미니즘이 뭔지 알려줄까?” "나는 이제부터 페미니스트야“ 같은 선언이 같은 마이크를 여전히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면 <누구의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가장 중요한 변화의 포인트는 여전히 생략되진 않을까. 누가 말하고 있는지, 누구는 말하지 못하고 있는지 살피고, 이 주제는 누구의 이야기로 근간을 삼거나 귀결되어야 마땅한지, 정의로운지 돌아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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