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그날 세월호의 슬픔은 국민의 눈동자에 눈물로 맺혀 있으나, 그 슬픈 죽음의 진실을 밝힐 길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 2016년 가을과 겨울, 광화문을 가득 매운 촛불의 분노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은 국회의 탄핵 의결로 한발 내딛었지만, 여전히 목마를 따름이다. 

거대한 기득권의 견고함은 이재용 삼성부회장 구속영장의 기각으로 확인되었다.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민심(民心)의 간절한 소망도 아직은 그저 메아리일 따름이다. 천만의 시민이 외쳤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오천 만 국민에게 현실로 다가올 것인가 아니면 다시 기득권과 불평등의 구조로 결박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촛불은 극단적 불평등을 멈추기 위한 국민의 신호

제왕적 대통령 권력, 탐욕적 재벌권력, 추악한 검찰권력을 해체하고 국민주권의 헌법적 가치를 실천하라는 것이 국민의 여망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소수의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극단적 불평등을 막아내라는 것이 국민의 요청이다. 

아이를 낳는 것이 두려운 나라, 경쟁의 무게감에 청소년이 자살을 선택하는 나라, 청춘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온밤 눈물로 보내야 하는 절망의 나라,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중년이 고통스러운 나라, 65세 이상 노인 절반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마는 슬픈 나라, 이것이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촛불은 절망을 희망으로 반전시키라는 구조신호(SOS)다. 

기득권을 해체하고 불평등을 혁파하는 것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문을 여는 열쇠다. 광장을 점점이 밝힌 불빛은 국민의 여망을 담은 거대한 ‘반딧불’이다. 희망이고 미래다. 낡은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가기 위한 출발이다. 

정치권이 촛불의 이름을 내건 것은 아이러니

그러나 도대체 알 수 없는 이 두려움은 무엇일까? 천만의 외침으로도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촛불의 광장은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광장을 벗어난 가정은 가부장적이고, 학교는 경쟁의 장이고, 일터는 살얼음판이고, 70~80대 어르신들은 500원을 받기 위해 뛰어야만 하고 종이와 박스를 찾아다녀야 한다면, 무엇이 변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촛불을 두려워하던 정치권이 촛불의 이름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야기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미 여의도에서 촛불은 사라지고 각 출마자 캠프마다 차기 대통령이 되기 위한 경쟁의 불빛만 남아 있다. 세상을 바꿀 제도와 법률에 대한 논의는 보이지 않고, 경선 규칙 논쟁과 이합집산의 정치공학만 여의도 밤공기를 적시고 있다. 2014년 세월호의 아픔을 치유하고 2016년 국민의 분노를 어루만질 수 있도록, 야권은 단결을 통해 ‘다수유권자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다수의 힘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두려움 없이 실천해 나가야 한다. 그 정부는 ‘약자를 위한 정부’이며 ‘다수를 위한 정부’가 되어야 한다. 

세월호 천일의 시간은 누구에게는 너무나도 길고 긴 칠흑 같은 밤길이었을 것이고, 턱턱 막히는 숨을 참고 견뎌온 고해였을 것이고, 터져버릴 것 같고 너무 아려서 두드리고 매만져도 담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였을 게다. 지금도 계속되는 천만의 촛불, 그것은 억눌리고 고통스러웠던 약자들의 희망을 향한 절규이고,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을 방치할 수 없다는 국민들의 요청이고, 기득권과 불평등을 혁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자존의 외침이었다. 분열을 뛰어넘어 더 크게 하나가 되어, 1947년 김구 선생님이 바라고 원했던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의 꿈을 이제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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