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


어느 날 대학 은사인 스승께서 책 한 권을 보내셨다. 평소 좋은 책이라고 판단하면, 스승은 당신의 서재에 소유하기보다 지인들에게 보내 돌려 읽기를 권하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며 직접 여러 권을 구입하여 여러 사람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그 특별한 계기로 만난 책, 『리스본행 야간열차』다. 스위스 언어철학자 파스칼 메르시어가 저술한 이 책은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스위스 베른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는 고서점에서 포르투갈어로 쓰인 『언어의 연금술사』를 접하고 그 책에 매료되어 저자를 만날 기대를 품고 리스본으로 떠난다. 그러나 저자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는 이미 고인(故人)이었고, 그레고리우스는 저자의 가족과 친구들을 찾아 그들이 가진 기억과 자료를 수집하며 아마데우의 삶과 철학을 조명한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나고 자라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로 살았고, 매순간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회의하는 철학자인 동시에 독실한 가톨릭 교인이며, 우연한 계기로 독재정권 저항운동을 지원하였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혼자 앓던 지병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주인공 아마데우가 자기 생애를 매우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이라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그가 삶에서 고뇌한 철학적 물음이 다른 나라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매력이 있다.

숨어 있는 맥락을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인간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돋보여

특히 1965년 8월, 아마데우가 자신의 병원에 실려온 응급 환자를 치료해준 것이 사건이 된 날의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환자는 당시 포르투갈 독재정권의 비밀경찰 간부 중에서 시민들에게 끔찍한 공포를 행사하던 자이다. 병원 밖에서 사람들은 죽이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아마데우는 그의 목숨을 살렸다. 그가 살아서 구급차에 이송되자, 흥분한 군중이 아마데우를 향하여 ‘배신자’라고 고함을 치고 얼굴에 침을 뱉는다. 죽을 때까지 돈 한 푼 내지 못하고 아마데우에게 무료 진료를 받았던 암환자 남편의 부인이 그들 앞에서 가장 심하게 아마데우를 모욕하였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맞서는 대신, 침묵 속에서 그 모욕을 견뎠다.

그는 생각했다. ‘난 의사요. 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사람이오. 군중 앞에서 내가 한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날 위해 그 일을 한 건가? 내가 훌륭한 의사요, 증오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지닌 용감한 인간임을 나 스스로에게 보이기 위해? 그러니까 도덕적인 허영심,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쁜 지극히 일상적인 허영심에서?’ 눈앞에 놓인 생명의 존엄에 대한 판단도 때로는 순수한 가치와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허영심의 발로일 수 있다는 의심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또한 군중에 앞장서서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던 여인에 대해서도 한낱 은혜를 저버린 인간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 날의 일을 함께 겪은 아마데우의 여동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처음에는 저렇게 은혜를 잊어버리다니 하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녀의 분노 뒤에 숨은 고통과 절망을 알아보고서야 그녀가 오빠를 너무나 고마워했기 때문에 침을 뱉는다는 걸 이해했죠. 그녀에게 오빠는 영웅이었고, 남편이 병을 앓던 그 어두운 시절을 동행한 수호천사요, 신의 사자였죠.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오빠가 그녀가 생각하는 정의를 방해한 거예요.’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맥락의 발견과 해석, 상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와 맥락을 이해하려는 인간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돋보이는 면이다. 

타자와 다름에 대한 수용력을 넓히는 데는 자존감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

한편 아마데우는 이 날의 사건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한다. 군중이 요구한 ‘한 사람 대 여러 사람의 목숨’이라는 계산의 논리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이 의심은 비밀경찰 간부의 목숨을 구한 날에 이어서, 탁월한 기억력으로 저항조직의 많은 정보를 두뇌에 입력한 여성 활동가를 조직이 위기상황에서 제거하려 할 때에도 발동한다. 결국 아마데우는 그녀를 구출하여 도피시킨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멩지스와 에스테파니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내 눈 앞에서 숨을 쉬고 있는 그 생명 자체의 존엄이다. 설혹 그 존재의 사회적 가치는 다를 수 있겠으나 그 생명 자체가 존엄하다는 원칙이 다르게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철학과 실천이 통치 영역이나 저항 영역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 다수주의에 입각한 결정 논리가 일반론인 점을 상기하면 이에 대하여 의심하고 회의하지 않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불경함을 갖게 만든다. 

소설은 그레고리우스와 그가 추적하는 미지의 인물 아마데우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그 둘은 여러 면에서 닮은 사람이다. 외면은 교사와 의사라는 직업, 박물관 경비원의 가난한 아들과 판사 아버지를 둔 부유한 태생이라는 신분을 비롯하여 분명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과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박사학위를 딸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순했다. 문법이든 표현양식이든 고전의 외진 구석까지 모두 알고 표현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역사를 아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일을 잘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겸손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와 유사하게 아마데우는 “그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깨어 있던 사람인지, 자신에게 얼마나 무자비할만큼 공정했는지...”라고 회상되는 인물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장인’이라고 부른다. ‘별다른 보상 없이도 일 자체에 몰입하여 깊은 보람을 느끼고 세심하고 까다롭게 일하는 인간’, 기술과 재주가 훌륭한 것만 아니라 행동하는 동시에 생각하는 존재들이다.(리처드 세넷, 『장인』, 21세기 북스, 2010). 상대주의 시대, 게다가 모든 가치가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역량은 어느 때보다 세심하게 생각하고 묻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성찰적 노동과 삶에 몰입하는 일이 아닐까. 

내가 일하며 최근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생각하는 개념이 ‘인권’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망망대해 같아서 알아가나 싶다가도 모르겠고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는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하나의 정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시공간을 비롯하여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진리는 인간은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것의 내용은 사회적 맥락과 상황에 따라 숙고하고 토론하여 조정하되, 할 수 있는 한 차별과 배제를 없애거나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는 이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공감, 타자와 다름에 대한 수용력을 넓히는 데는 우리가 장인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삶은 여행이다. 우리 의식과 존재는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레고리우스가 반한 <언어의 연금술사> 서문의 일부처럼, 오늘 당신은 어떤 문장에 직면하여 여행을 떠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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