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바라본 바이칼 호수의 일몰.
블라디보스토크행 비행기를 탔다. 연해주와 하바롭스크,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그리운 바이칼. 언제라도 이 이름들이 떠오를 때면 그윽한 웃음과 꿈꾸는 듯한 눈빛보다는 가슴에 품었으나 미처 두 발로 옮기지 못했던 내 삶의 숙제들을 생각하곤 했었다.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모스크바에서 바이칼 또는 북경에서 바이칼 등의 기행지를 다섯 번 경험했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또한 행복하기 위한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니 마치 행복해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인 것처럼 웃고 격려하고 얘기 합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을 바라보며 울컥 솟아나는 눈물이 있다면 그때 조용히 누구라도 사랑한다 말 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립시다. 일정은 매뉴얼이 있으나 대륙을 품는 도반들의 가슴엔 매뉴얼이 없습니다. 언제라도 연해주의 역사와 시베리아의 자작나무와 바이칼의 별빛과 홀로 대화 나누시기 바랍니다” 출발 전날 카메라 가방에 단출한 옷가지 몇 개를 쑤셔 넣으면서 다짐했던 내용들을 떠올리며 도반들께 인사말씀을 올렸다.
 
역사와의 대화를 하고 싶었다. 일부 인사들의 건국절 논란으로 인해 그 의미가 더욱 절실해진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정부장 최재형, 가진 재산을 미련 없이 조국의 독립에 쏟아붓고도 모자라 자신은 일본군 헌병에 의해 죽고 남은 아들과 딸 그리고 사위 7명 중 5명을 스탈린의 피의 숙청 때 잃은 멸문지화 가문의 아버지 최재형의 우수리스크 가옥은 어떻게 되었을까. 골목길 보도블록 교체작업비용이면 충분히 사들이고도 남을 그의 생가를 왜 한국정부는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 혀를 끌끌 차며 곤욕스러워했던 지난번 방문의 아픈 기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한국정부는 그 집을 사들였다. 내부 공사 중이라 주위를 둘러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지만 지난번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소설속의 혁명가 박성운을 먼저 보내고 애인의 독립운동 경로를 따라 연해주로 길 떠났던 조선 여인 로사의 행적도 궁금했다. 그보다는 하바로프스크 꼼소몰 거리 89번가 위태롭게 시베리아의 혹한을 견디었던 낙동강의 작가 포석 조명희의 작업실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을까 가 더 궁금했다. 그러나 우리를 안내했던 버스는 아무 흔적 없는 공사장을 지나며 이곳이 1938년 봄 일본의 간첩혐의로 소련군에 처형당한 작가 조명희의 집터였음을 담담한 목소리로 전할뿐이었다. 하바롭스크 공동묘지 입구에 있었던 그의 묘지도 언제였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이제 역사 속에서 조 명희란 이름은 공동묘지 앞의 추모비에 새겨진 수만 명의 이름 중 하나로만 남아있다.
 
대륙과의 대화도 숙제였다. 지평선을 넘으니 다시 지평선. 그 대지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실핏줄 같은 강줄기들. 시베리아의 태양을 반사한 강물을 보며 드문드문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강바닥을 긁고 파헤치고 댐을 쌓고 그러고도 개발의 완성을 자축하며 축포를 터트렸던 그자들의 게걸스런 입속에 녹조로 신음하는 강물과 그로 인해 파탄 난 민초들의 눈물을 한 바가지쯤 쳐 넣고 싶은 분노가 일 때였다. 시베리아는 여전히 잠자는 땅이었다. 강물이 흘러야할 곳엔 강물이 있었고 얕은 구릉 언덕엔 자작나무숲이 빛나는 햇살을 받았다. 저 숲은 누구의 소유일까를 생각하다가 아차 싶었다. 있어야 할 것은 있고 없어야 할 것은 없는 땅.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얻어가는 이 대륙에서 저 섬은 민영휘 일가. 저 땅은 이완용 후손. 저 건물은 삼성. 저 산은 조선일보. 지나는 곳곳마다 누구의 소유인가를 따져 묻는 게 일상인 나의 귓속에 대륙은 조용히 속삭여 주었다 
“그냥 조용히 위로받고 가세요”
 
횡단 열차가 바이칼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짙은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지나치는 작은 마을과 간이역도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차창도 또 일몰을 바라보는 일행의 눈가도 어김없이 죄다 붉게 물들었다. 저 일몰의 어디쯤 쪼그려 앉아 한 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생의 여한이 없겠다 싶었다. 바이칼은 생에 잊혀 지지 않을 황홀한 일몰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 순간 왜 4.16 세월호 합창단이 부른 노래가 생각났는지는 모른다. “사랑합니다” 노래 초입부터 음성이 흔들리다가 그만 “그리워 그대 노래가 (그대 내 가슴속 푸른 사람아)”하는 부분에선 노랫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그들의 합창. 선율 대신 속울음이 터져 나와 급기야 무대를 박차고 나온 이도 있는 슬픈 목소리. 자식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추모의 상징인 노란 리본까지 거추장스럽다는 힐난을 들어야 하는 고단한 나라의 백성. 스무날을 굶어가며 죽음으로 호소했던 요구마저 외면당하는 그들, 아니 우리들의 상처를 바이칼의 붉게 물든 노을이 기억하고 있었다. 일몰을 바라보다가 그만 울컥 울음을 울었던 나의 가슴을 도닥여 주고 있었다. 취한 보드카의 음성에 실어 작게 노래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라 날이 저문다고 모든 것이 저무는 건 아니니. 살아온 날들의 상처가 살아갈 날들의 새살이 될 때까지 고개 들어라. 황혼아. 세월호의 아이들아”
 
시베리아 대륙에 나의 아픔 모두를 던져 놓고 왔다. 그러니 바이칼이 그리울 때면 그 아픔도 기억해야할 터, 시베리아가 잊혀질리 없는 것처럼 나의 또는 시대의 아픔도 잊혀질리 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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