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색동 주민들의 문화활동 공간이 되다

 
▲수색역 광장 옆에 있는 하얀 건물 2층에 지중해 소나무 공방이 있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동네. 철길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고층빌딩이 즐비한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 비교해 수색동을 부르는 말이다. 하지만 2008년 새로 지은 수색역보다 이전 고즈넉한 옛 수색역이 더 좋았다는 사람들에게 수색동은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형제대장간과 수일시장, 은평에서 얼마 남지 않은 동네서점인 광명문고 등 오랫동안 수색동에 터를 잡고 산 사람들의 흔적들이 묻어있는 동네다.

수색역세권 개발과 수색뉴타운 사업으로 수색동은 큰 변화를 겪을 예정이다. 개발이 끝나면 더 이상 예전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뉴타운 입주민이 들어오면 수색동의 주민도 많이 바뀔 것이다. 물론 남아 있는 사람과 공간이 있을 테니 옛 수색동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을의 옛 기억을 품고 예전의 삶을 이어나가며, 몇몇 공간이 남아 있다면 옛 수색동은 유지될 것이다.

낡은 것들이 모여 사람의 손때가 묻어 완성되는 곳

수색동의 정체성을 마지막까지 이어갈 공간이 있다면 ‘지중해 소나무’ 공방을 빼놓을 수 없다. 지중해 소나무는 수색역 광장을 바라보고 오른쪽 하얀 건물 2층에 있다. 낡았지만 수수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이 건물은 수색역 광장 옆에서 반세기를 버텨왔다. 그래서인지 더욱 수색동에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지중해 소나무는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소나무 등 고목(古木)과 그 나무에 덩그러니 달려있는 붉은 우체통이 마치 높은 산에서 만난 산장에 온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지중해 소나무로 오르는 계단 천장에는 무심하게 풍경(風鈴)이 걸려있다. 그 뒤로 벽에는 나무 절편들로 만든 모자이크가 마치 현대미술의 추상화처럼 폼을 내고 있다.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계단을 지나 2층에 닿으면 추억 공간과 사물들과 만난다. 옛날 초등학교에서나 보았을 법한 난로, 재봉틀, 장독대, 낡은 책장, 목각인형….

지중해 소나무의 인테리어와 소품들은 어느 것 하나 정형화 한 것이 없다. 탁자와 의자들도 제각각이다. 소품 대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삐뚤삐뚤 자라는 나무가 그렇듯 모두 제멋대로 생겼다. 지중해 소나무를 운영하는 이경철씨(‘지중해 소나무’를 줄여 지소라는 별칭으로 부른다)가 직접 만든 소품들이기에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들과 다르다. 그런 개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멋스럽다. 나무가 주는 따듯한 느낌이 배어난다.

 
▲ 지중해 소나무 내부 모습(오른쪽)과 지중해 소나무로 들어가는 계단(왼쪽). 

지중해 소나무에는 폐목 혹은 고목들 외에도 버려진 것들로 가득하다. 낡은 페인트 통, 여자대학 기숙사를 허물 때 가져왔다는 벽체, 이경철씨 어머니께서 20년을 쓰고 버린 프라이팬이 소품으로, 인테리어의 일부로, 전등으로 재탄생했다. 재활용이라는 경제적 목적 보다는 새로운 것에 밀려 버려지는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경철씨의 독특한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사물은 시간이 지나면 때가 타고, 낡고, 효율이 떨어진다. 그래서 버리고 새로 만든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주기는 더욱 짧아진다. 그러나 생명처럼 나이를 먹는 사물은 그 나이에 어울리는 멋이 든다. 시간의 먼지가 켜켜이 쌓이고, 사람의 손때가 묻고, 색이 바라면서 완성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다른 시각에서 해석하고 다른 용도를 찾고 연결하면 낡은 사물도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이경철씨는 첫 눈에 보기 좋은 것은 싫다고 한다.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안 좋아해요. 진행형이 좋지. 이 탁자들은 처음에는 거칠었지만, 계속 쓰다보니 부드러워져요.” 그는 술이 익는 것처럼 세월이 흘러 더욱 성숙해지는 곳이 되길 바라 지중해 소나무와 목공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목공 기술을 조금 배우긴 했지만, 가르치는 대로 배우지 않았다. 늘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했고, ‘왜’라는 의문을 달았기에 그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정형화 된 것을 배우지 않아 자유롭다”고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삐딱하다. 하지만 따뜻하다. 지중해 소나무는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다.

수색동 마을예술창작소, 주민들이 모였다

공간에 대한 인상만으로 지중해 소나무를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취재를 나간 8월 17일 저녁 지중해 소나무 옥상에서 수색동 주민들의 소소한 마을 잔치가 열렸다. 오색유치원 권말순 원장, 광명문고 김숙이 사장, 예술수색단 정현식 단장, 수색동 마을기업 물빛마을 정진국 대표, 수색동에서 화실을 운영하는 이정연 화가 등 동네 주민들이 모였다. 그냥 주민들과 저녁이나 먹자고 불렀다지만, 알고 보니 이곳이 수색동의 마을예술창작소로 첫 발을 내딛는 날이었다. 지중해 소나무 아래 1층, 이경철씨의 부모님이 경영하는 식당 한 켠에 작은 공간을 확보해 마을예술창작소를 만들었다. 이날 그가 만든 간판을 그 앞에 내걸었다. 이곳과 지중해 소나무 그리고 수일시장 안에 확보된 공간이 함께 마을예술창작소로 기능한다. 마을예술창작소는 마을공동체 회복을 목적으로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주민들의 문화 공간이다.

앞서 지중해 소나무를 공방으로 소개했지만, 한 편으로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이기도 하다. 작년 5월부터는 주민들이 함께하는 음악회가 매달 한 차례 열렸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영미권 음악이 아닌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월드뮤직을 듣기도 하고, 음악가들이 직접 공연도 했다.

▲ 8월 17일 저녁 지중해 소나무 옥상에서 수색동 주민들의 소소한 마을 잔치가 열렸다.

이경철씨가 맡은 목공과 가죽공예 수업, 음악회에 더해 올해 초부터는 이정연 화가가 미술수업도 진행했다. 마을예술창작소가 되면서 앞으로는 더 많은 문화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다. 광명문고 김숙이 사장이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예술수색단 정현식 단장이 그림을 가르치고, 물빛마을 정진국 대표가 장 담그기를 가르치는 등 각자의 재능을 나누는 방식이다. 주민이 교사이자 학생이다. 마을예술창작소의 시작과 함께 수색동의 마을공동체도 이제 시작한다. 음악회를 맡아온 강민석 음악칼럼리스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민들의 재능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너무나도 소중한 우리들의 재능이고 자산이다. 그래서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으로 만들고 싶다. 수색동이 개발돼도 원래 살아온 사람들이 일부 남아 있는 한, 마을의 전통과 흐름은 남을 것이다. 나쁜 전통, 예를 들어 수 십 년 간 재개발에 매달려 땅값만 바라보고 살아온 삶은 정리가 될 것이다. 이제 좀 더 창의적으로 살아야 한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목공을 배우며 주민들이 함께 하는 것. 가족들이 함께 오고 주민들이 친구들을 데려 와서 같이 배우고, 성장하고, 그렇게 늙어가는 것. 그게 이곳 마을예술창작소의 목적이다.”

차를 마시며 바깥 풍격을 보면 옛 추억에 잠기는 곳

지중해 소나무는 카페이기도 하다. 식사도 할 수 있고, 차를 마실 수도 있다. 지중해 소나무 안에 있는 장독대에는 이경철씨 어머니께서 직접 담근 차가 익어가고 있다. 오디와 블루베리, 레몬, 쑥, 부추 등을 2~3년 숙성시켜 익으면 손님들에게 권한다. 수색역 기차길 옆으로 풍경도 좋다. 차를 마시며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으면 저절로 옛 추억에 떠오르는 곳이 바로 지중해 소나무이다. 지중해 소나무는 수색동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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