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민 사회복지노동자

 

 

봄의 끝자락을 향해가는 햇살마루(옥상정원)의 햇살이 눈부시다. 시원한 식혜를 손에 들고 손님을 맞이하는 그의 미소는 소박하지만 햇살만큼 눈부시다.

Q. 반갑습니다. 처음 은평시민신문(은시문)과의 인연이 궁금해요.

A. “2009년 고향인 부산을 떠나 처음 상경해서 은평에 살게 되면서 우연히 은시문을 보고 ‘우와! 이런 지역신문이!’라는 생각에 구독 신청을 했지요.”

그렇게 은시문 종이신문의 역사와 함께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Q. 어떻게 장애인복지를 위한 일을 하시게 되었는지요? 

A. “장애인 특수교육을 전공했지만 학교에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장애인의 일자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서울에는 놀러왔다가 우연히 ‘서부장애인복지관’에 입사원서를 냈는데 사실 처음에는 떨어졌어요. 그런데 면접에서 인상 깊으셨는지 다시 연락이 와 ‘직업재활' 업무로 입사하여 생애 첫직장에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네요.”

그가 서장복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직업지원팀’에서 성인 장애인들이 취업할 수 있도록 연계하는 일이었다. 장애인들이 초*중*고 12년의 학교생활 후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현실이 많이 안타깝다는 그의 말에서 여전히 격리되어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의 현주소를 알 수 있었다. 장애인들이 자립해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지만 복지관이라는 기관이 주는 한계에 많이 부딪히며 고민하고, 성장하고 있는 모습에서 듬직함이 엿보였다.

Q. 장애인 노동현장을 경험하면서 힘들었던 순간은요?

A. “발달장애(지적장애+자폐장애)를 가진 성인들이다 보니 단순 반복 작업 위주의 생산직, 햄버거 가계와 같은 프랜차이즈 서비스직에 주로 종사하게 되는데, 기업주는 장애인이라 차별받는 저임금으로 비장애인의 업무 능력이나 효율을 바라기도 해요. 국가지원금 등 기업이 받는 혜택이나 시장의 논리로만 장애인을 고용했다가 해고당하는 장애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때는 하아…….”

<삶창-일어서는 그가 눈에 밝힌다.> 기고에서 밝힌바 있듯이 당시 그가 하는 일이 '개별 장애인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소개하기 위해 좋은 사업장을 발굴하고 사업주의 부담을 경감할 지원책을 연계하며 장애인이 문제없이 적응하도록 보조하고 지원하는 업무'로 규정되고 한정된 관계로 실은 꽤 많은 무기력과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가뜩이나 어려워진 중소기업 사정도 고려해야 하고 예전보다 발전된 인식과 확대된 저변에서도 여전히 갈 곳은 마땅찮을뿐더러 열악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노동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니……. 그의 깊은 한숨에 깊이 공감된다.

“개인적으로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훌륭한 선배나 동료들의 이직을 곁에서 지켜볼 때였습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회복지 현장의 노동권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공공과 민간 중간에서 사회구조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애매한 부분들은 사회복지사들의 역량으로 전가되는 현실에서 많이 지치죠. 사업량에 비해 자본, 인력은 여전히 부족하고, 기록되지 않는 초과 근무, 사회복지관으로서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는 반면에 한국 사회에서 사회 복지의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는 현장 등…….”

잠시 말을 잊지 못하는 그의 눈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A. “15년 1월부터 지역팀에서 일을 하면서 은지네(은평지역네트워크), 장은사(장애인이 살기 좋은 은평을 만드는 사람들)로 새로운 힘을 받고 있어요. 연대의 힘으로 열린 생각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또 서장복은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많이 하고자 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감사한 일이죠. 직업팀에서 일할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는 장애인이 취업을 도와 취업에 성공했을 때, 내가 취업한 것과 같은 기쁨과 성취감을 느꼈고, 취업 후 그들이 담당할 업무를 직접 배워 장애인과 소통하며 그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할 때까지 작업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함께 할 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어요.”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사회복지 현장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삶을 오롯이 지탱할 수 없는 이들에게 박영민 조합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라는 그.

Q.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시죠.

A. “사회 전반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나 관행들이 많이 좋아졌어요. 근 10여년 사이에 <장애인차별금지법>,<발달장애인지원법> 등 제도적으로 보완되었고요. 이 모든 것이 당사자(장애인, 그들의 가족, 장애복지업무종사자)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얻은 투쟁의 결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대한민국의 속도는 너무 빨라요. 그리고 업무 현장에서 비장애인들만큼의 업무 성과를 요구하죠. 여전히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구조 속에서 진정으로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자.’는 말은 무의미하죠. 당장 우리 서장복에서조차 복지관만의 탓은 아니지만 60여명의 직원 중 장애인은 단 1명입니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들과 기꺼이 느림을 감수하고 함께 가겠다는 관점과 그 마음을 뒷받침하는 제도가 필요해요.”

발달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진정한 친구가 몇 명인가요?’라는 질문에 50%이상을 차지한 1위의 답변이 ‘아무도 없어요.’라는 결과를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는 그, 장애인역차별,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까지 걱정하는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여전히 캄캄한 것 같지만 우리 사회의 수많은 ‘박영민 사회복지 노동자’들이 있음을, 또 그들과 기꺼이 함께 하겠다는 시민사회가 있음을 알기에 눈부실 내일을 기대해본다.

그렇게 은시문 종이신문의 역사와 함께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Q. 어떻게 장애인복지를 위한 일을 하시게 되었는지요? 

A. “장애인 특수교육을 전공했지만 학교에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장애인의 일자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서울에는 놀러왔다가 우연히 ‘서부장애인복지관’에 입사원서를 냈는데 사실 처음에는 떨어졌어요. 그런데 면접에서 인상 깊으셨는지 다시 연락이 와 ‘직업재활' 업무로 입사하여 생애 첫직장에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네요.”

그가 서장복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직업지원팀’에서 성인 장애인들이 취업할 수 있도록 연계하는 일이었다. 장애인들이 초*중*고 12년의 학교생활 후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현실이 많이 안타깝다는 그의 말에서 여전히 격리되어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의 현주소를 알 수 있었다. 장애인들이 자립해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지만 복지관이라는 기관이 주는 한계에 많이 부딪히며 고민하고, 성장하고 있는 모습에서 듬직함이 엿보였다.

Q. 장애인 노동현장을 경험하면서 힘들었던 순간은요?

“발달장애(지적장애+자폐장애)를 가진 성인들이다 보니 단순 반복 작업 위주의 생산직, 햄버거 가계와 같은 프랜차이즈 서비스직에 주로 종사하게 되는데, 기업주는 장애인이라 차별받는 저임금으로 비장애인의 업무 능력이나 효율을 바라기도 해요. 국가지원금 등 기업이 받는 혜택이나 시장의 논리로만 장애인을 고용했다가 해고당하는 장애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때는 하아…….”

<삶창-일어서는 그가 눈에 밝힌다.> 기고에서 밝힌바 있듯이 당시 그가 하는 일이 '개별 장애인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소개하기 위해 좋은 사업장을 발굴하고 사업주의 부담을 경감할 지원책을 연계하며 장애인이 문제없이 적응하도록 보조하고 지원하는 업무'로 규정되고 한정된 관계로 실은 꽤 많은 무기력과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가뜩이나 어려워진 중소기업 사정도 고려해야 하고 예전보다 발전된 인식과 확대된 저변에서도 여전히 갈 곳은 마땅찮을뿐더러 열악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노동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니……. 그의 깊은 한숨에 깊이 공감된다.

“개인적으로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훌륭한 선배나 동료들의 이직을 곁에서 지켜볼 때였습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사회복지 현장의 노동권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공공과 민간 중간에서 사회구조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애매한 부분들은 사회복지사들의 역량으로 전가되는 현실에서 많이 지치죠. 사업량에 비해 자본, 인력은 여전히 부족하고, 기록되지 않는 초과 근무, 사회복지관으로서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는 반면에 한국 사회에서 사회 복지의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는 현장 등…….”

잠시 말을 잊지 못하는 그의 눈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A. “15년 1월부터 지역팀에서 일을 하면서 은지네(은평지역네트워크), 장은사(장애인이 살기 좋은 은평을 만드는 사람들)로 새로운 힘을 받고 있어요. 연대의 힘으로 열린 생각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또 서장복은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많이 하고자 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감사한 일이죠. 직업팀에서 일할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는 장애인이 취업을 도와 취업에 성공했을 때, 내가 취업한 것과 같은 기쁨과 성취감을 느꼈고, 취업 후 그들이 담당할 업무를 직접 배워 장애인과 소통하며 그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할 때까지 작업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함께 할 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어요.”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사회복지 현장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삶을 오롯이 지탱할 수 없는 이들에게 박영민 조합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라는 그.

Q.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시죠.

A.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대한민국의 속도는 너무 빨라요. 업무 현장에서 비장애인들만큼의 업무 성과를 요구하죠. 여전히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경쟁하여 살아남아야 하는 구조 속에서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자’는 말은 무의미해요. 당장 우리 서부장복조차 60여 명의 직원 중 장애인은 단 1명입니다. 복지관만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장애인과 ‘느림’을 감수하고 함께 가겠다는 마음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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