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지역방송은 뉴미디어의 총아였다. 민주화 이후, 정부가 지방자치, 지역균형을 내세우면서 지역방송은 새 시대의 촉망받는 미디어였다. 서울의 SBS를 비롯해 전국에 10여개의 지역 민간방송이 새로 생기면서 기존의 KBS, MBC 지역국과 경쟁하는 구도가 생겼다. 시군구 단위에는 종합유선방송국이 신규 허가를 받고 방송사업을 시작했고, 지역정보 채널이 생겨 소지역 뉴스와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역방송의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고, 디지털 시대를 맞아 졸지에 사양산업으로 전락했다. 위성방송과 인터넷 TV가 보급되면서 지역방송의 기능이 필요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국의 지역방송은 지역의 필요가 아니라 중앙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미디어였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는 방송국에서 시청자나 청취자들에게 프로그램을 전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서울에서 제작한 방송프로그램이 전국의 각 가정에 도달되려면 50-60킬로미터 간격으로 설치된 전파 중계소를 거쳐야 했고, 지역방송은 그러한 중계소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위성과 인터넷 기술이 발달하면서 중계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다. 중앙의 방송사들은 지역방송사를 거치지 않고 간편하고 저렴하게 프로그램을 직접 지역시청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역방송사에게 지불하던 중계비용과 지역방송국 유지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의 시청자들에게도 지역방송사가 불필요해졌다. 지역방송을 중간에 거치지 않고, 위성, 유선 혹은 인터넷으로 직접 중앙의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 지역방송사의 인력과 프로그램 제작비는 줄고, 그러니 지역방송 프로그램의 질은 떨어지고, 지역주민의 시청율은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경영합리화를 핑계로 KBS나 MBC등은 지역방송 통폐합을 단행했다. 일자리가 줄어든 지역방송 노조원들은 반발했지만, 해당 지역 주민들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디지털 기술의 변화는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도 아날로그 방송에서 디지털 방송시대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한국처럼 지역방송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나라는 드물다. 해외의 지역방송 역시 중앙방송을 중계하는 기능이 주된 기능이었지만, 그 존립기반이 지역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은 덕분이다. 지역방송이 중앙방송의 중계기능에만 매몰되지 않고, 지역 고유의 미디어로서 기능을 발휘해 왔기 때문이다. 즉 지역사회에 필요한 뉴스와 정보와 여론을 제공하는 미디어 기능을 충실히 해왔기 때문에, 디지털 시대에도 지역방송의 입지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역미디어가 제 기능 발휘할 때 지역사회는 건강해져

한국과 방송환경이 비슷한 나라가 영국이다. 국토의 크기도 그렇고, BBC위주의 국영방송 체제도 비슷하다. 영국에서는 BBC외에 지역민간방송 네트워크인 ITV, 위성방송인  BSkyB가 치열하게 시청율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영국의 TV 프로그램 시청율을 보면 지역뉴스는 늘 전체 시청율 1-2위를 다룬다. 지난 크리스마스 연휴 영국의 TV 시청율을 보면, 6시 40분의 전국뉴스 시청율은 5.300만명이었는데, 6시50분 지역뉴스 시청율은 5,600만명이었다. 현재 영국의 TV시청자의 가장 큰 불만은 지역뉴스가 부족하고 부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정부는 BBC 지역국의 기능을 강화하고, 소규모 민간 지역방송을 신규 허가하고 있다.

한국 지역방송의 위기는 중앙의 지위와 독과점적 지위에 안주해온 지역방송인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중앙방송의 지역국이라는 점만으로 경영이 안정되고 일자리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자연 지역사회를 위한 방송이 되기보다는 중앙을 위한 방송이 되는데 만족했다. 지역사회 공헌, 지역고유 방송브랜드, 지역 프로그램 차별성 등 선진국의 지역방송이 확보한 경쟁력을 국내 지역방송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디지털 시대에도 지역사회의 중요성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주고, 지역주민들이 상호 소통하는 미디어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지역방송은 그러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미디어이다. 지역방송이 중앙의 중계소가 아니라 지역 고유의 미디어로서 제 기능을 발휘할 때, 지역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은평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