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과 함께 짓는 마을학교 5]

▲아빠와 함께 1박2일 가족캠프에서 천연염색을 배우는 모습

아버지! 하고 입술을 모아 가만히 불러 본다. 그리고 아.버.지. 하고 끊어서 한 음절씩 읽어 본다. 어디엔가 의식의 깊숙한 곳에 간직해 두었던 존재의 밑동에서 울림이 전해진다. 거대한 자연의 뿌리와 이 울림이 닿아서 통로가 열리고 나의 영원의 시원을 만나는 듯 애잔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추억으로 연상되지만, 내게는 젊은 시절 어깨가 딱 벌어진 어깨와 나이가 들어 처진 두 어깨가 상징으로 비교되어 오버랩 된다. 그들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한 시대를 살다가 산화해 가고, 그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우리는 또 다른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이 거룩한 이름은 현재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곁에서 형상화 되어 있을까?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 하면서도 실상 딱히 해 줄 방법이 많이 없다. 그러나 에둘러 이야기하자면, 동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있고, 함께 살아가는 세월동안 함께 살 부비며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야말로 이미 거룩한 동행 아니겠는가! 

영국 길퍼드의 한 펍에서 일어난 폭탄테러 사건을 둘러싸고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짐 셰리던 감독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 1993>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오해와 화해의 과정은 아직도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적이고 지독한 동행도 있지만, 민중판화가 오윤의 <애비와 아들, 1983>에서 암시되는 동시대 질곡 속에서 같은 방향을 응시하는 아름다운 동행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두 세대간 동행을 진지하게 사유하도록 이끌고 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 안녕하신가?

이 시대의 우리, 아버지는 어떠하신가? 잘나고 못나고, 크고 작고, 높고 낮고 등의 사회적 인물로써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가족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아버지를 살펴보자.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 현실은 가족울타리 밖에서 고단한 일상을 보내거나 노동에 많은 시간을 소진한 아버지는 집안에서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에 맞닥뜨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들이 담당해야 할 양육과 교육의 영역이 축소되고 아머니들에게 전가되는 현상이 지속되기에 이른 것이다. 아이를 기르고 가르치는 정보에 대한 접근권에서 점점 멀어지고, 소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들은 진심으로 자식들과 멀어지고 싶은 건 아니질 않은가? 시간이 적어서, 정보가 부족하거나 방법을 잘 몰라서... 아니면 혼자 하기가 어려워서, 점점 아이들의 교육세계와 학교 울타리와 보이지 않는 담이 쌓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아버지 모임’을 만들기로 하였다. 

개교 첫 해에 모였지만 여전히 경험과 관심 부족으로 지지부진 하였으나, 드디어 2년차에 재조직하고 교사와 아버지들이 의기투합하기에 이르렀다. 담당교사가 배치되어 공식적인 학교 모임으로 자리 잡고 정기적으로 모이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나섰다. 일단 10여명의 아버지로 모임을 꾸리고, 눈사람이 대표를 맡아서 학교 및 마을 행사에 참여하면서 자체 프로그램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바로 <베짱이 음악회> 와 <아버지와 함께 떠나는 여름 가족캠프>이다. 아버지 모임에서 주최하고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연중행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또한 <금암문화예술제>, <은평시민대학 진관캠퍼스>, <진로교육-미래세상알기> 등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마을과 학교가 만나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간과 재능을 자라나는 미래세대와 함께 나누는 활동을 통하여 교육활동의 조력자 역할을 담당하면서 주민과 시민으로써의 주체형성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포도밭 작은 음악회가 베짱이 음악회로 

파주 장곡리에 있는 어느 노부부의 텃밭을 빌려서, 몇 집이 작은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그 어르신은 큰 포도밭 농사를 짓고 있었다. “어르신, 올해도 포도알이 꽝꽝 잘 여물었네요!” 하였더니, “그러면 뭘 해, 제 값도 못 받고 넘겨야 되는데...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인증절차가 복잡해서 포기했더니... 글쎄, 똥값이야!” 하시는 것이다. 매주 와서 정성껏 포도밭을 돌보는 것을 항상 본 지라서 슬그머니 걱정이 되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한 선생님과 고민을 하다가, 어느 한 날을 잡아서 포도밭에서 작은 음악회를 하면서 실컷 포도도 따먹고 집에 돌아갈 때 한 상자씩이라도 사가면 서로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불쑥 나왔다. “아, 그거 멋지네요!” 텃밭을 함께 하시던 정기훈샘께서 맞장구를 쳐주셨다. 그렇게 추진되던 포도밭음악회가 마당이 너무 협소하고, 너무 거리가 먼 관계 등의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접을 수 밖에 없었고, 그냥 학교나 마을에 많이 홍보하여 팔아주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래서 포도밭의 작심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학교로 공간을 이동하여 마을의 음악 축제로 꾸리기로 하였다. 아버지들과 교사 몇 분과 준비 모임을 꾸리고 행사 프로그램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나 곧 난관에 봉착했으니...! 마을에서 음악 관련된 사람들을 거의 찾기 힘들뿐더러, 학생들은 학교 축제인 <아람제>에서 발표하는 내용과 성격이 많이 겹쳤다. 그냥, 아버지들이 주최하기로 하였으니, ‘우리가 무대에 올라서 서툴지만 흥겨운 무대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의견으로 좁혀졌다. 

공동육아를 할 때 매년 송년회를 ‘해보내기 밤’이라는 작은 행사를 마련했었는데, 거기에는 부모들이 모여서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 ‘망가지면서’ 노래와 율동, 연극 등의 무대를 꾸민 경험이 있어서 자신감을 얻었다. 모두 “그렇군요, 까짓, 한 번 해봅시다!” 라는 뜻을 모아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객석에서, 부모들은 무대 위로!

항상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서 솜씨를 뽐내거나 교육과정 속에서 배운 재능을 뽐내는 형식에 익숙해져 있는데, 이 무대는 역할 바꾸기다. 아이들은 객석에서 관객이 되고 어른들이 무대에서 솜씨를 자랑하는(?) 곤욕스러운 행사로 치러진다. 그리고 1부에는 아이들이 평소에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장르의 음악과 무대공연들을 섭외해서 완성도와 흥미를 보태기로 하였다. 그리고 횟수가 보태지면서 이웃에 있는 ‘물푸레 합창단’, ‘꿈꾸는 합창단’ 등의 지역사회와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자연스런 파장의 확산이다.

이렇게 첫 해 공연이 실행되었다. 아버지 몇몇이 모여서 프로그램을 정리해 나갔고, 1부의 외부 섭외는 인디언이 맡기로 하였다. 기획 및 연출은 인디언과 아버지회 담당교사이신 김성수샘이 맡기로 하고, 음악회 이름도 지었다. ‘일만 하는 개미와 노래와 연주만 하는 베짱이’가 화제에 올랐다. 이 시대 아버지들은 아이들에게 ‘일만 하는’ 개미같은 노동하는 존재로 인식되어진다. 그래서 ‘노래하며 노는’ 베짱이가 부러울 뿐이다. 아버지의 일하는 일상적 긴장(tension)을 잠시나마 노래하며 즐기는 이완(relaxation)의 마을살이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동네 베짱이 음악회>로 정해지게 되었다.

음악회 준비는 투 트랙으로 진행되었다. 1부에서 진행 할 외부 초청공연의 섭외 및 조정이 진행되고, 2부에 올릴 아버지 합창과 율동 무대 연습 및 가족단위의 음악 솜씨자랑 섭외로 진행되었다. 아버지회의 자발적, 강압적(?) 출연진이 꾸려져 나갔고, 그 외 가정통신문을 통해 출연 신청자와 가족 신청이 이루어 졌다. 인디언은 협소한(?) 인맥 망을 통해 초대할 대상들을 물색해 나갔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음악가들과 더 친분을 쌓아 둘 걸!’하면서 노심초사 했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와 마을이 행사 홍보를 진행하면서 참여를 견인해 나갔다.

베짱이가 무대에 오르다.

그러나, 무대공연의 하이라이트로 설정한 아버지 합창단 공연연습이 쉽지 않았다. 합창곡과 율동곡도 정했지만,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 평일 날 퇴근 후 시간을 맞추기에 애를 먹었다. 하는 수 없이 토요일과 일요일에 보충 연습을 하기로 했고, 보기에 딱하셨던지 학교 선생님들도 여럿이 참여해서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또 다른 고비는 인디언 같은 ‘음치’에 ‘박치’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에 자신이 없을 뿐 아니라 노래방 분위기가 싫어서 안간 것이 후회되는 대목이다. 계속되는 삑사리(?)에 음정도 잘 안맞는지라, 그야말로 민폐였다. 몇 번이고 중도에서 그만두겠노라고 이야기 했는데, “인디언 같은 사람이 있어야 재밌다”라든지, “합창이니 입모양만 잘 해”라고 격려인지 놀림인지, 암튼 기다려줬다. 그리고 솔로 대목도 떠맞게 되었다. 인디언이 낭패로다.

그러나 아버지는 용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습에 속도가 붙었고 섭외 및 프로그램 준비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나갔다. 드디어 마을과 학교가 힘을 모아서 무대공연을 올리게 된 것이다. 눈사람, 보자기, 인디언, 달팽이 등 20여명의 oo아빠와 oo샘들과 함께 만드는 무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다른 출연진에 비하면 실력 면에서는 많이 뒤떨어지지만 자신감만은 하늘을 찌를 태세다. 그러나 모두들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떠올리고, 무대 밑에서 지켜 볼 가족과 아이들을 생각하며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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