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과 함께 짓는 마을학교 3]

▲동네 문화제가 되어버린 금암 문화제 풍경 ⓒ인디언

어느 날 무심히 마을길을 걷다가 역사가 우리를 툭 건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2013년, 특별한 기대 없이 나섰던 마을 탐방에서 ‘금암기적비’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인디언, 보자기, 정기훈)의 눈엔 불꽃이 튀었다. ‘기적비’ 라는 이름 앞에서 시쳇말로 ‘심쿵!’했다. ‘우리가 찾던 보물이 여기 있었다니!’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금암기적비(서울유형문화재 38)’와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저 금암문화공원 한 모퉁이에 존재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이 비(碑)님께서 우리가 내민 손을 잡아주셨다. 그날 그 곳에 있던 우리 모두의 마음은 이미 ‘해보자!’하며 화답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구하여 얻은 비문엔 수려한 문장으로 설화적 내용까지 들어가 있었다. 작은 이야기라도 상상력을 입히면 현재적 의미가 되어 부활한다. 응고된 역사를 풀어나가고 싶어졌다. “역할극이라도 해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시작 되었다.

역사가 내민 손

이야기의 대강은 이렇다. 영조가 왕자신분인 연잉군시절 경종원년(1721)에, 부왕 숙종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다 밤이 깊어서 덕수천(창릉천)변의 금암의 참사에 쉬게 되었다한다. 며칠 동안 굶어서 소를 도둑질을 하게 된 사연을 접하고, 작년에 흉년이 들어 피폐해진 민중의 살림살이를 살피며 참장더러 처리하라고 하였다.

낮은 직책의 관리였던 참장은 딱한 처지를 헤아려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소도둑을 고발하지 않고 방면하였다는 사연이다. <홍제전서>에는 “저게 모두 흉년 통에 기한(飢寒)에 찌들어 그러는 것인데, 그러나 농사꾼이 소가 없으면 어떻게 밭갈이를 할 것인가. 참장이 비록 낮은 직책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직은 직이니 네가 해결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한다.

독재주의나 전제주의국가 일수록 법치를 내세워 민중을 수탈하고 민생을 뒷전으로 밀어내지만, 민중을 선정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어진 정치가 여기에 있었다. 바닥을 훑고 있는 민생을 살피고 헐벗은 서민경제를 고려하는 따뜻한 민주 정치가 여기에 있었다. 이를 영조 재위 50년간의 선정과 치적의 징조였다고 받들어 정조5년(1781)에 직접 글을 내리어 비석을 세운 것이 ‘금암기적비’인 것이다.   

더구나, 이 일이 있고 다음날 궁궐로 돌아오는 길에 종묘사직을 맡으라는 세자 책봉되었다. 정조대왕은 이 일화를 할아버지인 선왕시대에 이루어진 선정의 서막이라고 해석할 만한 조짐이었노라고 받들며 신성한 귀감이라 칭송하였다.

이에 60년이 흐른 또 다시 맞이한 신축년(1781, 정조5)이 되었다. ‘이 소자(小子)는 중추절(仲秋節)이 오면 명릉을 배알하고 검암에 들려 옛 자취들을 낱낱이 찾아볼 생각인데, 그것은 나의 작은 정성의 발로인 것이지 꼭 조상을 그리는 마음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검암 발참이 해묵어 퇴락했기에 경기 관찰사로 하여금 그 면모를 새롭게 하고 주위를 치워 비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도록 명하고, 눈물을 닦으면서 삼가 그 당시의 사실을 기록하고 명(銘)을 붙인 것’(양홍렬 역, 1998, 홍제전서 제15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짧은 신화와 같은 기록이 온 마을을 들썩이게 한 것이다.(*검암은 금암의 옛이름이다)

우리 동네 보물을 받들다.

여러 번의 회의와 뜨거운 뒤풀이들을 거치면서 생각과 의지가 모아졌다. 처음에는 작은 역할극 공연을 하자고 했던 것이 마음들을 쌓으니 마을 잔치로 바뀌었고, 드디어 ‘금암문화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일이 커지기에 이른 것이다.

우선 ‘토요예술학교’라는 토요 방과후 활동을 계획하여 실행하였다. 올해가 3회차로 토요예술방과후가 진행되고 있다. 첫해의 예산은 서울시 마을지원사업에 신청하여 치렀고, 그 후로는 구청에서 예술제의 가치를 인정해주어 전폭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100여명의 은빛초 학생들과 학부모, 마을 주민, 그리고 학교 교사들과 은평구 내에서 활동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결합된 형식이다.

방과후 활동을 마친 후에 그 결실로 학생들이 행사의 홍보와 무대를 직접 만들고 꾸민다. 홍보용 펼침막과 포스터, 안내장을 직접 만들고 무대 소품과 의상도 고사리 손으로 완성한다. 무대에 서는 아이만 주인공이 아니라 소품을 만들고 무대를 꾸미는 모든 아이들이 주인공인 것이다. 더 나아가 행사를 추진하는 마을과 학교가 주인이고, 그 일을 축제로 즐기기 위해 기꺼이 참여하는 관람객 또한 주인공이 된다.

은빛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사회, 미술 등의 프로젝트 수업을 통해 문화제와 결합하고, 차곡차곡 모아 온 결과물들이 야외 공연장 주변에 공개 전시된다. 아버지들은 무대 만들기와 설치를 돕고, 어머니들은 디자인반에서 무대의상의 바느질을 돕거나 동네주민들을 위해 잔치음식을 만든다. 온 동네가 몸과 마음을 모아 한바탕 시끌벅적한 공연마당과 동네잔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시작했던 동네문화제가 횟수를 더할수록 내용도 점점 살이 붙어간다. 첫 해에는 마을주민들과 아이들이 함께 무대를 만들고 소품과 배우들의 옷을 만들고 합창과 연극으로 본무대를 꾸렸다. 학교 선생님들도 휴일에 나와서 역할을 맡아주시고, 학부모들과 주민들이 방과후 활동에 보조로 들어가서 재능기부를 하였다.

노래가사는 아이들의 동시를 받아서 만들고, 은빛학교 모둠북동아리와 택견 방과후, 물푸레합창단과 북한산초등학교 숲속노래모임에서 찬조 출연을 해주어 무대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두 번째 해는 아버지들의 율동과 어머니들의 기타합주가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3년차인 올해, 무대의 다양화를 위해 뮤지컬하기를 기획했고, 예전 졸업생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위해 동아리 형식으로 결합할 수 있게 고리모임도 만들었다.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자라 미래 사회를 굳건히 지탱해주길 바라는 마음, 우리가 마을에서 아이를 함께 기르면서 교육 혁신을 논하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마을의 누군가가 “뭐에요? 인디언!”하고 문제제기를 할 것 같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엉망진창인 이 사회에서 그걸 바라다니요?” 이렇게 어이쿠! 하고 한 소리 들을 수도 있겠다. “ 진흙 속에서라도 아이들의 미래를 담은 연꽃은 피워내야 하지 않나요?” 궁색하지만 아직은 마을학교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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