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서애란 초대전 및 은평지역 커뮤니티 회원전 ‘물, 색, 그리다’

▲서양화가 서애란 초대전 및 은평지역 커뮤니티 회원전 ‘물, 색, 그리다 Ⓒ남궁정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정희성 詩 「숲」


산하의 초목이 앙상하게 맨 가지를 드러내놓는 겨울이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만큼 세파도 매섭게 몰아치는 것 같은 연말. 최근 통계청은 지난해 한국인의 ‘이웃에 대한 신뢰도’는 61.2%,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도’는 12.7%에 그쳤다는 우울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홀로 서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리지어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처럼, 외로운 우리들도 정녕 이 차가운 세상에서 온기있는 사람의 숲을 이룰 수는 없는걸까.

미국유학 시절, 동떨어져 울던 그 자작나무는 마치 나와 같았다

지난 20일, 은평문화예술회관 전시관에서 열렸던 수채화 전시회 ‘물, 색, 그리다’가 막을 내렸다. 은평에서 나고 자란 서양화가 서애란의 초대전이자 그가 강사로 활동한 수채화교실 회원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한 행사였다.


학창시절, 미대 진학을 꿈꾸는 소녀였던 서애란 작가는 집안의 반대로 1984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믿음이 강한 크리스천이면서도 사람을 참 좋아했던 그는 2002년, 마흔을 앞두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마침내 미국 시카고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생활을 하던 10여 년간, 사무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음 속 한구석엔 언제나 외로움이 있었어요. 특히 멀리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가장 컸다고 할까요? 제가 살던 곳은 호숫가를 따라 자작나무 숲이 있었는데, 겨울이 되면 껍질이 하얗게 벗겨져 곳곳이 벌어지고 튼 모양이 꼭 사람의 눈 같더라구요. 그중 홀로 떨어져있는 자작나무를 보면서 ‘아 마치 나와 같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이 작품의 영감이 됐지요”


또한 정희성 시인의 「숲」을 읽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과 시인의 심상이 여러모로 일치하는 것 같았다고. 그의 「자작나무 숲」 연작은 우리 사회 개인들이 처해있는 고독감과 외로움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작업의 산물이다.


▲좌측이 서애란 작가, 우측은 수채화교실 회원 추운순 씨 Ⓒ남궁정


‘품 안에 3대’를 생각하며, 은평에서 수채화 강좌를 시작하다

그가 미국에서 배우고 온 것은 그림만은 아니었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에서도 할머니들이 부모 대신 손주를 돌봐준다는 사실이 그를 놀라게 했다.


“어떤 할머니들은 집에서 손주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함께 그리고 있었어요. 무용을 전공한 사람은 무용을 알려주고요. 특히 공공도서관 같은 곳에서는 일주일에 몇 회씩 공간과 미술재료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할머니와 함께하는 그림교실’을 진행하고 있더라구요. 세대 간의 단절과 어르신 돌봄 문제가 심각해지는 요즘, 조부모와 어린 자녀들이 교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미술이 쓰여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그즈음 ‘품안에 3대’라는 말을 생각했다. 서 작가는 어린 시절, 일가친척들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치 대가족처럼 자랐다.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서로가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면서도 자녀 세대 교육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삶의 방식을 ‘품안에 3대’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은 ‘그림’을 통해 그것을 실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2011년 귀국한 직후, 그는 청소년들이 입시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여러 번 접했다. ‘왜 우리 청소년들은 이럴 수밖에 없을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품안에 3대’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동네친구였던 지인에게 이러한 고민을 털어놨더니, 그로부터 열린사회은평시민회를 소개받았다. 주민 대상 문화예술강좌를 진행하던 시민회도 마침 그림을 전문적으로 가르쳐줄 강사가 필요한 참이었다. 그리하여 작년 3월, 수채화 입문에 대해 8강으로 짜여진 수업을 시작했다.

사르르 풀리는 물감처럼, 닫힌 마음의 문 열었던 수채화교실

처음 수채화교실에 문을 두드린 수강생들은 대부분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평소 그림을 그려본 적도, 그릴 줄도 모르는 평범한 ‘동네 주민’들이었다. 서 작가는 8주 짜리 입문 수업에서 수채화란 무엇이고,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어떤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 알려줬다. 그 후, 수업참가자들이 수채화동아리를 꾸리고 그에게 더 가르쳐줄 수 없냐고 부탁해 심화 워크샵이 진행됐다.


점차 수채화 교실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가 늘어나 야간반도 개설되었고, 역촌동 신나는애프터센터에서도 수업이 시작됐다. 직접 햇빛을 받으며 그리는 야외 작업이 효과적인 수채화 특성상, 올 봄부터는 ‘밖에서 그리다’ 강좌도 열렸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 중 절반은 대부분 회원들이 야외수업을 통해 은평 곳곳을 다니며 야생화와 일상 풍경을 그린 그림들.


“도시락 싸서 같이 나눠먹기도 하고, 음악도 듣고 수다도 떨면서 산으로 들로 소풍가듯이 4~5시간 함께 다니는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암 투병 중임에도 함께 하신 분도 계셨는데, 같이 모여서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만큼은 무척 행복해하셨죠”

전시장을 지키고 있던 역촌동 주민 추운순 씨(59)도 그런 이들 중 한명이다. 추 씨의 작품 「잎새의 속삭임」은 입구와 가장 가까운 쪽에 걸려있었다. “한창 먹고 사느라 바쁜 시절을 보냈고 그림 같은건 전혀 모르고 살았어요. 붓이 뭔지, 물감이 뭔지도 몰랐는데, 처음엔 노래교실이나 다닐까하다가 얼떨결에 수채화교실을 듣게 됐어요. 8주 마감이 끝나고 왠지 모를 아쉬움에 계속 배우게 됐죠”


남편과 함께 두 자녀를 키워오며 그동안 마음에 여유가 없고 자기감정도 억누른 채로 살아왔다고 털어놓은 추 씨는 수채화를 접하면서 점차 자신도 몰랐던 마음속의 벽을 허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답답할 때, 생각날 때마다 그림을 붙들고 싶어졌어요. 물감이 풀어지는 그 느낌이 좋아서, ‘그래 바로 이거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림 속 세상으로 빠져드는데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새벽 3시까지 그리고 있더군요”


추 씨는 나중에 일손을 놓게 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에 행복하다며 “나처럼 마음 닫고 살았던 은평의 이웃들에게 이 기쁨을 나누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수채화는 ‘입시미술’, 자기 표현하고 즐기는게 미술 역할

그런데 왜 하필 ‘수채화’였을까? 서 작가는 원래 유화를 주로 그려왔다. 하지만 처음 미술을 접하는 이들의 눈높이를 고려해 보다 편안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수채화를 강좌 소재로 택했다.


“수채화가 가진 고유의 성질, 예를 들어 물감을 칠한 종이 위에 소금을 뿌리면 색이 변하고 예상 못한 모양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런 점을 활용해서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수업을 꾸리고자 했죠”


사실 한국의 학교에서 수채화는 입시미술을 위한 도구 중 하나로 인식된 지 오래. 서 작가는 학교 미술이 수채화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을 가르치지 않고, 틀에 박힌 ‘기술’을 전수하는데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또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 강좌도 과도하게 기교를 강조한다고 꼬집었다. 그림을 배운다고 해서 모두가 화가가 될 것도 아닌데, ‘즐기기 위한 과정이 왜 이리 길고 힘든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다.

 

“우리 주변에 ‘지금은 못하지만, 난 언젠가 그림을 그릴거야’라는 마음을 품고 있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이 계세요. 그분들이 배우는 미술은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봐요. 미술은 여타 예술 분야하곤 다르게 즐기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기술도 필요하지 않아요”


▲이번 초대전은 서애란 작가의 작품 이외에 은평 지역 수강생들의 작품들이 함께 전시됐다 Ⓒ남궁정


주민의 힘으로 열려 더욱 값진 지역작가전 1호, 향후 목표는

서애란 작가는 국내외를 통틀어 6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수상경력을 지닌 실력 있는 아티스트다. 사실 이번 초대전은 귀국 후 그가 갖는 첫 번째 전시였다. 게다가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처음으로 열린 지역작가전 1호이기에 더욱 의미가 남다르다.


“사실 저뿐 아니라 수채화교실 회원들의, 주민들의 힘이 모였기에 가능했던 전시회라고 생각해요. 우리 회원들이 그동안 서로 이심전심 챙겨주고 아껴주는 모습에 여러 번 감동 받고…” 서 작가는 수채화교실을 통해 만난 이들과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동네 친구’로 생각한다고. 그러면서 회원들의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는 그를 살피니, 은평과 은평사람들에 대한 적잖은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갈현동에서 열린 벼룩시장 행사에 작품을 전시했는데 주민들이 관심 갖고 물어보세요. 제가 그린 그림이라고 했더니 놀라면서 저더러 ‘동네 아줌만지 알았다’고 하시는데, 저도 ‘제 컨셉이 동네아줌마에요’라고 말하죠”


서 작가가 말하는 은평은 ‘사람냄새 나는 곳’이다. 그가 40여년 간 대조동에서 마주보고 살아온 한 이웃집은 서로 문도 안 잠그고 왕래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 이런 은평에서 근래 창작 활동의 새로운 활력소를 찾게 된 서 작가에겐 작은 목표가 생겼다.


“8주 강좌를 듣는 분이 1년에 80여명 정도 됐거든요. 이분들이 한 번씩만 또 다른 이웃들에게 수채화에 대해 알려줄 수 있다면 그 파급력은 상당하겠죠. 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좌를 고정적으로 여는 것이 목표에요. 얼마 전 중2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처음엔 긴장됐지만 지금은 ‘쌤!’하고 부르면서 안기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시카고의 차디찬 겨울을 홀로 나던 자작나무는 은평으로 돌아와 또 다른 나무들과 숲을 이루려 하고 있다. 지친 이웃들이 그림을 통해 새 힘을 받을 수 있도록, 수채화로 맺어진 사람 숲들이 앞으로도 서로에게 기대고 부대끼며 더 울창한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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