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피지않은 연꽃 @이지상

연꽃이 보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양수리로 가 두물머리 언저리를 배회했다. 연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꽃이 피지 않았으니 지는 일도 없었다. 피지도 못한 청춘이 맥없이 시드는 시절, 그것도 돈 때문에 시드는 시절, 연 이파리위에서 혼자 저녁햇살을 머금고 있는 물방울을 보며 끝없는 원망만 되뇌었다. 왜 세상은 피어나지도 않은 연꽃만큼도 못한 것일까.

세찬 풍랑이어야 했다. 아니면 칠흑같은 어둠이었거나 형체도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여야 했다. 적어도 300여 명 씩이나 되는 순한 목숨을 데려갈 처지였다면 인간으로서는 도대체 어쩌지 못하는 대 자연의 분노 하나쯤은 함께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게 다 돈 때문이었다. 이미 퇴물이 된 배를 사들이고 거기다가 구조변경이다 뭐다 층수를 더 붙이고, 손 비비고 돈 집어넣어 사용연한을 10년쯤 더 늘린 게 그렇다.

선박에게는 생명수나 다름없는 평형수를 빼내고 그만큼 화물을 잔뜩 실었다거나 혹은 그게 일상이었다거나 6천 톤이나 되는 거대 여객선의 선장을 고작 270만원의 월급에 1년 계약 비정규직으로 만든 것도 선박직 15명중 9명이 비정규직이었던 것도 그렇다. 승객의 안위보다 회사의 결정이 더 중요했던 비굴한 선장의 보고를 받고도 퇴선명령보다 손익계산에 더 분주했을 선주의 핏발선 눈빛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것도 죄다 돈 때문이었다. 순박한 아이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채로 “기다려 기다려 어른들이 기다리라고 했어. 침착해”그렇게 기다릴 때 침몰하는 배 주변을 빙빙 돌며 탈출하는 승객들만 건져 올린 해경이 그렇다. 배 위로 올라가 선실의 문을 열고 승객들을 탈출 시키는 일은 고사하고 하다못해 망치로 유리창이라도 부수고 밧줄만 내려 줬어도 될 일인데도 손쓰지 않다가 나중에야 ‘초등대처 미흡 죄송’ 한마디로 때우는 것이나 해군 U.D.T나 S.S.U 심지어 구조헬기와 미군 구조함의 지원도 마다하고 사고초기의 금쪽같은 시간들을 오직 그들의 구세주 언딘(UNDIN)을 위해 바친 해경이 더욱 그렇다.

사고 당일 해경의 사주를 받아 10여년을 거래해온 구난업체를 버리고 언딘과 계약한 청해진 해운과 언딘의 자유로운(?) 돈벌이를 위해 민간 잠수사들의 자원봉사조차 차단하고 또 통신 기록 조작의혹까지 있는 해경을 보면 끔찍하게도 더더욱 그렇다. 발터 벤야민이 지적한 ‘자본주의는 세속화된 종교’ 라는 말이 통용 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지만 이번의 경우처럼 적나라하게 숨김없이 적용되는 예도 흔치 않다. 사고 이전부터 사고이후 지금까지 소위 ‘자본주의’라는 종교를 가진 광신자 집단의 혼탁한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배 안의 아이들은 창문너머로 보이는 구명보트를 향해 살려 달라 외쳤고 그 외침은 배와 함께 침몰했다.

나는 자본주의란게 제로섬(ZERO-SUM)게임의 사회임을 믿는다. 누군가 많이 가져가면 누군가는 그만큼 빼앗긴다. 추모 분위기를 무마시키고 적당한 출구전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된 언론과 정부의 찰떡 담합과 무관하게 온 나라가 세월호가 되고 온 국민이 상주가 되어 슬퍼한다. 300명의 선한 생명을 빼앗겼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 흘리는 수많은 추모객들이 있다면 그것을 방관하며 은근한 웃음기를 머금는 자들도 존재한다. 그것이 ‘돈과 사람의 목숨을 바꾸는’ 비열한 사회 즉 제로섬 게임 사회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일이 있다. 순박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겼으니 누군가는 그 슬픔을 돈으로 바꿔 가질 것이다. 그 누군가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애도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그들을 단죄하는 일이다. 그게 피지도 못한 채 져야만 했던 아이들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예의다.

오는 6월 4일은 지방선거 일이다.

저작권자 © 은평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