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시베리아 여행법7-1637미터의 심연 하보이 곳

저게 다 물이다. 간밤의 잠자리에서 심상(心像)으로만 그렸던 바이칼의 파도소리는 들을 수는 없으나 후지르 마을을 떠나 하보이 곳으로 향하는 길의 왼편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가는 5월의 나뭇잎을 지천으로 깔아놓은 듯하다. 호수의 빛깔이 그랬다. 게다가 세상의 모든 빛은 그곳에만 떨어지는지 차가 한번 씩 흔들릴 때 마다 호수에 비친 햇살은 마치 달빛을 품은 메밀밭처럼 넘실거린다. 세계 민물 량의 20%를 차지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조선팔도의 강물을 죄다 모아도 이 거대한 호수에겐 아침녘에 훑고 지나간 소나기 정도란 얘기다. 어림잡아 아시아 대륙의 민물 정도는 모아야 비교가 가능하다. 총 길이도 636KM이니 부산에서 동해선 타고 삼척 강릉 지나 원산이나 청진쯤 가야하는 거리이다. 일찍부터 서둘러 떠난 길의 목적지 하보이 곳은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곳 이란다 1637미터. 서해바다의 평균수심이 약 100미터가 채 안 되는 것을 고려하면 실로 “장엄하다”라는 말 외에 다른 수사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 숙소에서 출발하기 전 나는 물 한 컵을 조심스럽게 받아 양치질을 했고 고양이 세수를 했다. 숙소에는 수도가 없었다. 내 고향마을에서도 소싯적에나 쓰던 펌프를 발견하긴 했으나 그 조차도 사용하지 못했다. 샤워장은 있었지만 바가지로 끼얹는 수준이어서 맘 놓고 샤워를 한다는 건 불가능 했다. 각 숙소마다 배정된 물의 량이 있고 새벽에 물차가 한정량을 배달하면 그것만 사용해야 한다. 당연히 반(反)아침형 인간인 내가 일어났을 때는 남은 물이 조금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나보다 늦은 일행들도 생각해 줘야 하니 고양이 세수라도 한건 그나마 다행이다. 
 
▲     © 이지상

세계 최대의 담수량을 자랑하는 물의 천국에서 물 부족 현상을 겪는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알혼섬의 모든 숙소는 정해 놓은 이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는데 바이칼이 없으면 관광객도 없고 삶도 없다는 그들의 기본 철학을 다시 생각하면 이들이야 말로 1637미터의 심연보다 더 깊은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로 인해 이 성스러운 바다 안에 떠있는 스물두개의 섬은 빛나고 있고 나는 그 섬 중 가장 큰 알혼 섬의 북쪽 끝자락을 향해 달리고 있다. 
 
어디서 오셨나요? 남 아니면 북?
 
출발한지 한 시간 여전히 우아직은 비포장도로를 흙먼지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하마터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만큼 덜컹대기도 하고 흔들림으로부터는 잠시도 자유롭지 못한 굴곡이 심한 도로인데도 이 차는 속도를 줄일 줄 모른다. 어젯밤의 숙취 때문에 잠깐씩 눈이 감길법도 하지만 운전기사 양반은 러시아여인의 신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는 그 박자에 맞추어 엑셀레이터를 밟는 통에 차 안에서의 깜빡잠은 꿈도 꾸지 못한다. 30분쯤이나 더 지난 뒤에 도착한 하보이 곳은 거대한 언덕이다. 이 언덕의 오른편으로는 높이가 100미터는 족히 되 보이는 절벽이 수평선과 닿아있고 그 아래 호수의 파도는 절개지를 쉼 없이 두드린다. 
 
절벽의 끄트머리에서 수면을 바라보는 일도 아득하기만 한데 저 파도의 나이를 생각해 보니 더 아득하다. 무엇이 그리워 파도는 저렇게 쉼 없이 뭍을 향해 달려오는가. 2500만 년 전 쯤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굳게 잠긴 절벽의 문을 두드리는 파도의 포말위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파도가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 나의 호흡을 얹으며 세월의 무게를 견디는 시간 조용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서 오셨나요?” “아~네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이라면 남? 아니면 북?” 어젯밤 니키타 하우스의 올가에게서 받은 질문을 또다시 받는다. 쓰리다. “남쪽이요”라는 대답을 하고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지만 이역만리 타국에서야 바다를 건너지 못하면 아무데도 갈 수없는 섬나라 주민이라는 걸 확인한다. 
 
대륙인으로서의 삶이 그리워 졌다
 
그놈의 北이라는 글자가 문제였다. 北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디찬 시베리아 한랭전선 北쪽에서 들려주는 역사는 반란 반역의 역사. 北쪽에서 전하는 소식은 핵의 공포와 전쟁의 위협. 어느 것 하나 사람의 삶에 맞아 떨어지는 게 없으니 가 볼 수도 꿈 꿀 수도 그리워 할 수도 없는 불가촉천민들이나 사는 세상 이었다. 北이라는 글자가 우리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는 만큼 南이란 글자는 더욱 커졌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따뜻한 나라. 대양의 파도에 춤추며 청운의 꿈이 물결치는 희망의 땅. 그래서 튀어도 북이 아니라 “남쪽으로 튀어”야 했다 “똥도 미제가 좋다”는 시골 어른들의 우스갯소리가 사실이 될 만큼 대양(大洋)의존적 삶을 살았다. 법과 교육체계 그리고 관료체계는 일본의 것을 경제체계와 사회 제도는 미국의 것을 베꼈다. 
 
▲     © 이지상

그렇게 60년.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가?” 온전한 대륙인으로서의 삶이 그리워 졌다. 굳이 호태왕과 고선지장군의 대륙은 아니더라도 만주와 대 홍안령 그리고 바이칼을 품었던 우리 역사에 발 디디고 싶었다. 단재가 전해준 “조선상고사”의 너른 품과 하다못해 춘원이 만들어낸 최 석과 정임의 애달픈 바이칼의 사랑을 따라가며 그 안의 “카레이츠” 우리 아닌 또 다른 우리로 사는 그들의 끈질긴 삶속에서 희망 한줄기 건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제 민족의 땅은 밟지도 못하고 기차여행도 아닌 海外여행을 떠나온 사람. 고작 바이칼 호수보다 조금 더 큰 섬나라에서 온 여행객일 뿐이었다. 나의 더듬거리는 영어에도 같은 분단의 아픔이 있는 독일인 부부는 한국의 상황을 잘 이해해 주었다. “당신은 학자인가?”를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음악 만드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구 동독의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Karl Wolf Biermann 1936년 11월 15일 ~)’을 좋아하고 그의 노래 ‘warte nicht auf bessere zeiten’(더 나은 시간을 기다리지 마라)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곡이라고 했다. 그들은 잘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당신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했고 나도 그러길 바란다고 했다. 잠깐의 대화에서 그들이 내게 준 마지막 문장은 행운을 빌어요 였다. “당신과 당신의 나라 코리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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