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홍범도를 아는가. 
 
1937년 9월9일 새벽 블라디보스톡 역을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가축 칸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어디쯤이라는 목적지도 없는 긴 여행을 떠난 유랑자 홍범도를 아는가. 불모의 땅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서 하루의 생계를 걱정하며 말년을 보낸 고려극장 문지기 홍범도를 아는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다시 전장터에 나가 일본 놈을 무찌르고 내 나라를 되찾겠다고 카자흐스탄 당국에 호소하던 73세의 노인 홍범도를 아는가. “평생 일본 놈들에게 안 잡히고 여생을 마칠 수 있어서 나는 복 받았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올해로 꼭 70년째 이역의 땅 스따라야 마기라-홍범도의 무덤이 있는 곳-를 배회하는 영혼 여천 홍범도(1868-1943)를 아는가. 
 
최재형을 아는가. 고려인 최초로 지신허의 러시아 학교에 입학해 문학을 공부한 함경도 노비의 아들 최재형 말고 군납과 건설을 통해 타고난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연해주 최고의 거부가 된 최재형 말고 1896년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고려인대표로 참석하는 남도소 초대 도헌 – 고려인 자치기관의 수장- 최재형 말고 안중근이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이등박문의 암살을 모의 하고 사격 연습을 했던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사 사장 최재형 말고 일본군대에 비해 모자랄 것 없는 전투 장비를 갖춘 연해주 항일 의병의 배후 최재형 말고 그 사람 최재형을 아는가. 
 
▲ 이르쿠츠크 자작나무숲     © 이지상

 
대한국인 안중근이 여순 감옥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보호했던 단 한 사람 최재형을 아는가 1920년 4월 5일의 참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고려인 300여명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 북간도 경신(庚申)대 참변. 일본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일제가 해외조선인에게 가한 3대 학살중 하나- 이틀 후 평생의 동료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과 함께 생을 마감한 니콜리스크(현 우수리스크) 부시장 최재형을 아는가. 남아있는 재산을 미련 없이 조국의 독립에 쏟아 부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부장 최재형을 아는가. 자신은 일본군 헌병에 의해 죽고 남은 아들과 딸 그리고 사위 7명중 5명을 스탈린의 피의 숙청”때 잃은 멸문지화 가문의 아버지 최재형을 아는가.
 
김 알렉산드리아를 아는가. 시베리아 내륙에서 일하는 고려인 중국인등 소수민족 노동자들 속에 들어가 소비에트를 지키자고 호소했던 혁명가 김 알렉산드리아 말고 최초의 고려인 소비에트 당원이자 극동 인민위원회 외무부장 김 알렉산드리아 말고 러시아 혁명과의 연대 반제(反帝)반일(反日)을 통해 독립을 이룩하고자 했던 한인 사회당 창당의 주역 김 알렉산드리아 말고. 그 사람 김 알렉산드리아를 아는가. 러시아 정교회 신부인 고려인 오 와살리와 부부의 연을 맺고 식민지 조선 민중의 아픔을 얘기하며 밤잠을 설친 고려 여인 김 알렉산드리아를 아는가. “공산주의의 씨가 자라서 멋진 꽃을 피우게 하세요 이것이 모든 장애와 바람 폭풍을 극복한 뒤 조선에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모든 지역의 노동자들의 자유를 위해 나는 죽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하바롭스크 죽음의 골짜기에서 러시아 백위군에 의해 최후를 마친 민족주의자 김 알렉산드리아를 아는가. 그녀의 시신이 아무르 강에 던져진 1918년 9월18일 – 이 날은 일제가 만주사변(1931년 9.18)을 일으킨 날과 동일하다- 이후 하바롭스크의 시민 그 어느 누구도 그 강가에서 낚시를 하지 않았다는 슬픈 전설을 기억 하는가.
 
한인 사회당의 당수 위대한 사회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 이동휘를 아는가. 4개국을 망명하며 역사를 기록하고 지금은 홍범도의 옆에 누워있는 사학자 계봉우를 아는가. 일본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면전에 폭탄을 던진 노인 동맹단 강우규를 아는가. 아버지 이준의 헤이그 순국을 가슴에 품고 백위군과 싸운 고려 의용군 사령관 이용을 아는가. 4개 국어에 능통한 피 같은 아들 이위종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보내고 큰아들 이기종 또한 조국 독립 운동을 위한 외교활동에 헌신하게 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에서 쓸쓸하게 목멘 애국외교관 이범진을 아는가. 최고려를 아는가 이인섭을 아는가. 백마장군 김경천 김유천을 아는가. 게릴라 전술의 일인자 한창걸을 아는가. 사할린 부대 박일리아를 아는가. 
 
드넓게 펼쳐진 이르쿠츠크의 자작나무 숲 사이로 눈발이 흔들렸다. 그리고 가쁜 숨 몰아쉬며 스키를 지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갔다. 바람이 한번 씩 불때마다 어디선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 가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숲에서 나는 오래전 가지가 꺾인 나무들부터 눈길을 들이대며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저 나무는 침례교 목사 출신 백초 김규면. 저 나무는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파의 거두. 37년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 오하묵. 저 나무는 레닌을 만난 박진순 한형권. 대학 도서관의 구석쟁이에 쳐 박혀있어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이름들. 모두 내가 사는 분단의 땅 남쪽의 역사에서는 사라진 인물들이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붙이다가 어느 순간 그 거대한 숲에 무릎 꿇고 앉아 보드카 한잔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혹한의 땅 시베리아에 와서야 떠올리는 게 가능한 이름들이라니 너무 죄송하지 않은가. 애초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익숙한 이름들은 따로 있었다.
 
정일권 신현확 최규하. 그리고 박.정.희 따위의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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