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시베리아 여행법-겨울 앙가라강변


영하 37도 공항 로비에 있는 현재 이르쿠츠크의 기온을 알리는 전광판의 숫자다. 길게 줄을 지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때 까지만 해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단순히 숫자 하나가 이곳이 시베리아의 한복판임을 일깨워준다.
 
떠나오기 전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시베리아 거기 춥지 않아요?”.“당연히 춥지요 아니 춥겠지요” 거기까지가 내 대답 이었다. 미리 현지의 추위가 영하 40도 쯤은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추위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추위에 대한 경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 부엌 문 옆에 매달아놓은 막대온도계는 항상 영하 20도였다. 아궁이위에 얹어놓은 무쇠솥의 끓는 물로 고양이세수를 하고 손바닥이 쩍쩍 달라붙는 문고리를 잡을 때에도 문풍지 웅웅 우는 겨울밤 술 취한 아버지를 마중 나가 몇 발짝 앞에서 자전거를 끌고 오는 날에도 온도계의 수치는 변하지 않았다.
 
군대에서도 그랬다. 새벽 6시 “기상” 소리가 들리기 전에 이미 전투화를 신고 있어야 했던 신병시절의 점호시간 내무반 앞에 달린 온도계도 언제나 -20도 였다. 입김을 안개처럼 뿜어대며 웃통을 벗고 구보를 했고 성질 고약한 일직사관은 군가 소리가 작다고 빠알갛게 언 등짝을 지휘봉으로 찰싹 찰싹 때렸다. 심장까지 후려치는 것 같은 싸늘한 통증의 온도가 -20도였다. 그 당시에 쓰던 알코올 온도계의 눈금에는 그보다 추운 날을 측정하는 숫자가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곤혹스런 상황을 표현할 때 곧잘 시베리아에 비유하곤 한다. 선거에 떨어진 어느 정치인이 그랬다. 시험 결과가 신통치 않은 수험생도 그랬고 벌이가 시원치 않은 직장인도 손님 없어 한가한 가게 주인도 하여튼 세상사가 녹록치 않다는 걸 몸으로 증명해온 사람들은 다 그랬다. “요즘 좀 어때? ” “추워. 추워 시베리아 한복판 같어” 


▲ 움직이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얼어있다.     © 이지상

이유야 어떻든 나는 내가 체험했던 가장 극한의 온도인 –20도의 두 배나 되는 혹한의 땅 모든 사람들이 고통의 유형지로 정리해 버린 시베리아에 와 있는 것이다. 공항 대합실을 나와 처음으로 뉴스에서만 듣던 시베리아 고기압의 냉기류를 맞는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땀 뻘뻘 흘리며 놀던 아이가 구멍가게에 뛰어 들어가 아이스크림 냉동고에 얼굴을 갖다 대는 느낌이라면 적절할까.
 
차를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에도 두 볼은 얼음 팩을 비비고 몇 분쯤은 있었던 것처럼 얼얼하고 코끝은 살짝 마비되어 불어오는 한기를 걸러 내는 기능을 잃고 두툼한 장갑 낀 손으로 갖다 대기만 해도 금새 금이 갈 것 같다. 빈속에 소주한잔을 들이킨 것 같은 짜릿함이 폐부 속 깊이 전해 온다.
 
보드카를 들이키는 상상도 하기 전에 이미 나는 시베리아의 한랭전선에 취해간다. 상쾌하다. 비교적 온화한 기온을 가진 나라의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살았던 나는 그런 내 몸을 숙주로 하여 수십 년 간 기생해왔던 삶의 잡상들. 온갖 불필요한 것들과 언제나 싸워왔다. 여과되지 않은 찬 공기를 한번 씩 호흡 할 때 마다 혈관의 구석 구석을 흔들어 켜켜이 쌓여있는 독소들을 치유하는 느낌. 나는 두 팔을 벌려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이르쿠츠크의 공기를 들이 마시며 나를 청소한다.
 
336개 의 지천을 받아들여 북극으로 향하는 바이칼호수의 유일한 출구 앙가라강변에 서면 이 상쾌함은 배가 된다. 시내와는 비교 할 수 없이 옹골차게 부는 바람은 강 언덕위에 쌓인 눈발을 흔들고 휘저으며 폭풍처럼 내 얼굴을 때리고 발 끝 까지 시베리아에 마취당한 몸은 때 아닌 눈보라의 볼모가 되어 물안개 자욱한 작은 마을로 발걸음을 옮긴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경쾌하다.
 
시베리아의 날씨는 무척 건조한 편이다. 습기가 거의 없으니 지난 9월쯤 내렸을 첫눈이 아직도 쌓여있고 그 수많은 눈 알갱이들은 각자 독립된 개체가 되어 강바람에 날린다. 눈송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들려고 해도 전혀 뭉쳐지지 않는다. 한 웅쿰의 눈을 두손으로 떠서 공중에 흩뿌리다가 얼굴에 비비며 나의 흐릿한 시야를 씻어낸다. 



▲ 북극으로 가는 길. 혹한에도 얼지 않는 앙가라강     © 이지상

흐린 눈빛 으로는그 어떤 시선과도 마주하지 말 것
받을 수 없는 가슴이라면 그 어떤 포옹도 하지 말 것
그러나
그리움은 외로움으로 인한 아린 병이라고 
단 하나의 사랑과 악수하기위한
두 손의 온기는 남겨놓을 것

언제든지 깨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한다”고 여겼던 20대의 다짐은 그렇게라도 나를 강제해야만 지켜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해가 바뀌고 새로운 날들이 오면 사람들은 내게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는 무엇인가를 물었으며 나는 거기에 적절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반문했다 “눈앞에 닥친 수백 가지의 일들에 대한 관심을 두는 것만으로도 일과가 벅찬데 왜 사람들은 목표라는 것을 설정해서 스스로를 혹사 시키려고 하는가?”. 불러주는 곳에서 노래했고 들어주는 곳에서 강연을 했다. 내가 지쳤다고 생각 될 즈음엔 음반을 내고 책을 썼다.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세상”이 사람이 사는 가장 좋은 세상 이라고 누군가 말했을 때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있을 것이 없으면 새로 만들면 되고 없을 것이 있으면 합심해서 없애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섣부른 20대의 다짐 이후에 20여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는 별개로 있을 것은 점점 더 귀해지고 없어야 할 것들은 차고 넘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한바탕의 폭풍 같은 바람이 지나간 후 앙가라 강엔 더욱 짙은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영하 40도의 혹한에도 강물은 얼지 않았다.
 
이깟 추위로 얼어버릴 강물이라면 감히 바이칼의 후손일수 있겠느냐는 앙가라 강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 하다. 북극해로 떠나는 머나먼 길 여기서 얼어붙을 수는 없다는 강물의 자존심이 추위에 움추린 나의 어깨를 두드린다. 저녁 햇살을 받으며 춤추듯 넘실거리는 저 차디찬 강물에 나는 이제 별 성과 없이 지쳐버리기만한 나의 내장을 하나하나씩 꺼내어 씻으려 한다. 



▲ 얼지 않은 강물 위로 얼어붙은 다리를 지난다.-이르쿠츠크 시내로 가는 길     © 이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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