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중력 이르쿠츠크

<나 만의 시베리아 여행법-두 번째 이야기>

간밤에 잠을 설쳤다. 여행을 앞둔 설레임이라기 보다는 나의 생활 방식이 그렇다. 새벽이 주는 고요함과 고독감 또 새로운 날의 햇살을 뜬눈으로 확인해야한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 때문에 나는 늘 여명이 돋아오는 시간쯤 잠을 청했다.
 
왜 여행이라는 종자는 아침 일찍부터 부산을 떨어 잠 한숨 못 자게 해놓고는 비몽사몽간의 공간 이동을 종용 하는가. 오후 서너시쯤 출발. 공항집결 시간은 오후 두시. 이런 일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늦은 듯한 아침식사와 차 한 잔. 그리고 가족과의 따뜻한 작별인사. 고작해야 열흘쯤 되는 일정이라도 그 정도의 여유는 허락되어야 한다고 늘 우기지만 난 단 한 번도 그 시간에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다.
 
비행기의 출발시간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새벽 6시에는 무조건 택시를 타야한다는 말만 주문처럼 외웠었다. 아마도 비행기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고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피곤할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산다. 이번의 일만 잘 치루면 이 고비만 넘기면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믿음은 언제나 나를 배신했다.
 
기회의 신 “카이로스”라는 이가 수북한 앞머리를 흩날리며 내 앞을 지나갔을 때 나의 시선은 늘 다른곳을 향해있었고 그이의 존재를 확인 했을 땐 박박 밀어버린 그이의 뒷 머리채를 낚아챌 수도 허리춤을 움켜쥘 수도 없었다. 그이의 발에는 날개가 달려있어서 나의 흐린 눈으로는 그이의 뒷모습을 바라 보는 일조차 버거웠을 때가 더 많았다.
 
“영과후진(盈科後進)-孟子”이란 말을 믿고 살았다. “물은 웅덩이를 빗겨가지 않는다”는 이 말을 누군가 말해주었을 때 나는 한발자국을 더 나아가기 위해 눈앞의 물웅덩이를 메꾸는데 진력을 다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을 즈음엔 물웅덩이가 점점 더 커졌거나 몇 개의 웅덩이가 더 생겼다. 애시당초 우회로는 없었다. 그러니 질퍽거리며 물웅덩이와 씨름 하는 것이 나의 삶이었다.
 
고단한 나날이었으나 즐거움도 그 안에서 찾았다. “적당한 갈망 지나친 낙관”이란 나만의 표어가 삶을 지탱해 주었다. 바이칼 호수로 시작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이번여행은 나의 낙관을 지지해줄 것이다. 내가 상상했던 세계에 견줄 수 없는 거대함으로 나의 갈망을 다독거려 줄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지 않아도 좋다 그저 바이칼의 언덕위에서 너의 모든 짐을 던져보아라. 호수에 작은 파문이라도 새겨진다면 그것으로 너의 삶은 괜찮다. 괜찮은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으러 겨울비 추적거리는 1월에 이르쿠츠크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 안개에 덮힌 이르쿠츠크 시내     © 이지상

덥다. 한국을 떠나오는 시간엔 포근하게 겨울비가 내렸고 비행기 안의 온도도 시베리아의 악명높은 추위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남극을 제외하곤 안 가본 나라가 없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C의 조언을 들었다. 지구상의 아무리 혹독한 추위라도 보드복 하나 입으면 충분하단다. 그래서 떠나기 전날 보드복을 샀다. 그게 사단이었다.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까지는 견딜만 했다.
 
그러나 서해 해상과 북경 상공을 지나 내몽고 자치주 대 홍안령을 넘으며 움직일 데도 없는 비행기 안에 4시간여를 갇혀 있으려니 발가락 끝까지 땀이 차는 느낌이다. 옷을 갈아입을 곳도 마땅치 않다. 한잠도 못자고 출발했는데도 당췌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못자는 이유는 또 있다. 당연히 나의 몸이 허공에 떠있기 때문이다. 두발을 땅에 딛고 걷는다는 것 등짝을 바닥에 붙이고 눕는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를 비행을 하면서야 안다.
 
나의 몸 아래로 솜이불처럼 깔린 구름을 구경하는 거야 신나는 일이지만 난기류를 만날 때 마다 철렁대는 심장은 지상(地上)의 그 어떤 경련보다도 무서운 일이다. 하늘만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저무는 날의 태양을 감상할 수 있다면 그보다 큰 행운은 없겠으나 만에 하나있는 비행 사고를 떠올리는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질 나의 모든 것을 생각하면 비행기 안에서 안대를 두르고 태평하게 코를 고는 사람들은 내겐 경외 그 자체이다.
 
사실 높은 곳은 다 위태롭다. 보기만 해도 까마득히 솟아있는 대형교회의 십자가도 어둠의 군주 사우론의 성(城)을 닮은 주상복합 아파트 꼭대기도 하루에도 몇 명씩이나 오르려 한다는 한강대교의 아치도 “해고는 무효다”를 더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노동자의 철탑도 모두 위태롭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만의 호화로운 삶을 위해 높은 곳으로 가고 어떤 이들은 가난한 삶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아니면 더 이상 추락하지 않기 위해 높은 곳으로 간다.
 
비행을 하는 시간만큼은 가장 위태로운 곳에 있는 나는 신이 있다면 하늘에는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인간들이란 자기가 믿는 신을 가장 위태로운 하늘 꼭대기에 매달아 놓고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같은 종족들을 얼마나 많이 착취해 왔는가 말이다. 나는 다시 신이 있다면 지구의 가장 중심부에서 더 낮은 곳을 향해 진지하게 기도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중력에 의해 삶을 보장받고 중력은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중력의 중심부에서 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즈음 비행기의 고도가 점점 낮아진다. 비행기 창에 끼인 서리가 시베리아의 추위를 짐작케 한다. 눈 덮힌 도시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강물 위로 짙은 안개가 띠를 두르고 굉음을 내며 바퀴를 드러낸 비행기가 그 위를 스쳐 흔들리며 착륙한다. 드디어 도착했다. 시베리아의 중력 이르쿠츠크.



▲ 이르쿠츠크 국제공항     © 이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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