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시베리아 여행법- 첫번째 이야기
 
새벽두시. 이전투구. 돈 놓고 돈 먹기의 야바위 세상이 효율과 경쟁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되어 가로등 불빛도 사라진 골목처럼 어둠 짙게 깔려있는 시간. 무엇을 위한 효율인지 누구와의 경쟁인지도 살펴볼 틈새 없이 날 밝으면 다시 고단한 일터로 나가야 하는 누군가의 단잠을 기억하며 이 글을 쓴다.
 
일상. 나의 눈으로 보고 내 머리로 생각하며 내 가슴으로 느끼고 내 발로 걷는 일종의 습관. 따로 연습하거나 반성할 필요도 없이 너무도 익숙해서 눈 감고도 해댈 수 있는 단조로운 실천. 일탈(日脫)이라는 말도 있다.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사고로 생각하고 타인의 가슴을 내 가슴에 이식시키거나 타인의 발걸음을 내 발로 옮겨 보는 일. 그것이 일탈이라면 모든 일탈은 성찰에 가깝다.
 
누가 그랬다 “시키는 일만 하면 개도 미친다- 김정운의 칼럼제목-고. 집에 들어가면 간단한 안부를 묻고 TV를 켰다가 불끄기 전엔 내일의 일정을 살핀다. 눈 뜨면 자기 전에 생각해 두었던 일정대로 몸을 움직이며 정해진 매뉴얼도 없는데 이미 정해진 결과를 향해 코를 킁킁거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참 열심히 한다고 여기다가 혹 누가 시켰는지를 나만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꽤 깊어질 때 쯤 “그래 이만하면 나도 미칠 때도 됐다” 싶다




© 이지상
 
새벽 세시. 이 원고에 마침표를 찍으면 미리 쌓아둔 짐을 들고 나는 시베리아로 간다.

이미 몇 권의 책과 세 번의 횡단열차 경험을 토대로 이번 여행에서 깊이 간직해 두어야할 내용들은 챙겨 두었다.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에서는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파의 행적을 돌아볼 셈이다. 영하 30도가 넘는 도심의 외곽에서 눈보라 견디며 아직도 혁명을 외치는 레닌동상을 끼고 돌면 레닌가 33번지가 나온다. 그 즈음 어딘가에 있을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파의 거두 김철훈. 오하묵. 최고려이성의 이름을 부르며 술 한 잔 올리고 싶다

날이 어두워지면 겨울에만 볼 수 있다는 러시아 예술의 진수를 이르쿠츠크 대극장에서 감상할 생각이다. 백야의 여름철엔 전 세계로 나아가 외화를 벌고 본토에서는 오직 겨울에만 공연한다는 이름 높은 러시아 예술가들. 볼쇼이발레단 합창단. 상트 오케스트라. 붉은군대합창단. 그 어떤 공연이라도 좋다. 그들의 바람과 그들의 토양과 그들이 음식이 있는 그들의 고향에서 오직 그들에게 보여주는 최선을 다한 공연을 낯선 이방의 눈으로 바라 볼 수 있다면.

3박4일에 걸친 횡단 열차 안에서는 함께 여행하는 길동무들의 얘기를 들을 것이다. 작은 기타하나 들고 가서 뽕짝도 좋고 소녀시대도 좋고 도반들이 부르는 노래에 반주를 곁들이며 노을 지는 광활한 지평선 너머 또 다른 지평선을 향해 보드카 한잔 들고 건배를 외칠 것이다.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변의 전설 김 알렉산드리아의 결기(結氣)는 여전한지도 물어야 겠다. 한인 최초의 볼세비키 일생을 민중을 위해 살다간 조선 처녀 김 알렉산드리아에게 지쳐있는 한반도를 고백하고 당신이라면 어쩌겠소 그녀가 들려주는 조언을 깊이 새겨야 겠다.


© 이지상
 
바이칼 호수에 발 디딜 생각을 하면 벌써 마음이 설렌다. 지난여름 나는 하루 온종일 바이칼 해변을 들락거리며 빈둥댄 적이 있다. 영상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와는 전혀 다르게 수온8도를 유지하는 차가운 바이칼 호수에 몸을 담그면 온 몸이 오그라들었다. “아!춥다”이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전혀 못했다.
 
다시 해변으로 나오면 그제서야 보인다. 청명한 하늘과 구름 호수의 푸른 빛깔 따끔따끔하게 내리쬐는 햇살. 그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반라(半裸)의 사람들. 보이는 것이 모두 번뇌라면 차라리 눈감고 호수에 들어가 추위라는 하나의 고통과 시름 하는 게 더 큰 수양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계 민물의 20%를 저장하고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물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아침녘에 미리 받아놓은 물을 작은 통에 넣고 찔끔거리는 수도꼭지를 통해 밥도 하고 세수한다.
 
그런 그들을 나는 참 미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람의 길 마을과 마을의 소통이었던 강줄기를 꼭꼭 틀어막아 댐을 쌓고 주위를 온통 콘크리트로 도배질 한 후 개발의 완성을 자축하는 게걸스러운 나라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간이라도 내어줄듯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외쳐대는 내 누이의 비굴함과 거기에 얹혀사는 이들을 비참하게 무릎 꿇리는 자본의 비정함이 몸에 밴 나라에서 온 나는 바이칼이 없으면 삶도 없다는 그들의 가장 순결한 지혜를 이해하지 못했다

겨울 바이칼. 에머랄드빛 물결을 바위보다 더 단단한 얼음으로 바꾸어 놓은 시베리아의 광풍에 뜨거운 입김이 눈썹의 서리로 내려앉으면 언 손 비비며 기타를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노래 한곡쯤 부르고 올 테다.


새벽 네 시

이제 길을 나서야 한다. 공항에서 만나는 도반들에게 부탁드릴 말씀도 준비해야 겠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또한 행복하기 위한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니 마치 행복해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인 것처럼 웃고 격려하고 얘기 합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을 바라보며 울컥 솟아나는 눈물이 있다면 그때 조용히 누구라도 사랑한다 말 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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