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운동의 대모 김혜경 전국빈민연합 고문 인터뷰

전태일기념사업회 회보 <사람 세상> 3~4월호 '조혜원이 만난 사람'에 실린 글입니다. 조혜원씨는 이 회보에 인터뷰 고정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과 관련하여 철거민 관련 단체가 참 많지만 좀 더 넓은 눈으로 이 문제를 이야기해 줄 분을 찾다가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편집자주-
 
“용산 참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기가 막히고 먹먹할 뿐이에요.”
 
30년 넘게 빈민 운동에 뿌리를 박고 살아 온 ‘빈민 운동의 대모’로 불리는 전국빈민연합 김혜경 고문. 수십 년 동안 빈민들과 더불어 살며 온갖 철거 현장을 몸으로 겪어 왔음에도 최근에 벌어진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만은 받아들이기가 힘들기만 합니다.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에도 주말이면 꼬박꼬박 청주에서 용산 추모대회가 열리는 광화문으로 발걸음을 하고 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용산 사건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생명을 빼앗긴 사례에요.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건 항상 생명을 내놓고 사는 거나 다름없죠. 더 큰 문제는 국민들이 자기 자신을 확실히 모르고 있다는 건데 다들 환상에 젖어 있어요. 우리나라에 중산층이 없어진지 오랜데 많은 사람들이 중산층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을 만큼. 그러니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하지요. 국민 전체가 깨어나야 해요. 자기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재개발.’ 너무 많이 들어서 익숙한 말입니다. 하지만 재개발 때문에 생긴 ‘철거민’ 문제는 용산 사건이 벌어진 지금도 여전히 낯설기만 합니다.   
 
“박정희 쿠데타 이후 1 2차 경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서울중심으로 집단 이농이 시작됩니다. 하루 이농 인구가 50만이 넘을 정도로 많이 올라왔어요. 그 사람들이 도심지에 있는 산동네나 쪽방에 살면서 산업 빈민이라는 집단이 생겼죠. 서울로 사람이 너무 몰리니까 정부는 60년대 말부터 ‘도심지 불량주택 개량사업’을 시작합니다. 산동네를 중심으로 강제 철거를 해서 수도권 주변으로 집단 이주를 시키는 거죠.”
 
이렇게 ‘철거민’의 역사는 30년도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 고문이 연세대 도시빈민연구소에서 전문 활동가 수업을 받고는 서울의 대표 빈민 거주 지역인 창신동에 살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입니다. 
 
“69년에 창신동 주민들한테 사전 정보도 없이 집단 계고장이 날라 왔어요. 철거를 할 테니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시)로 이주하라는 내용이었죠. 창신동은 어려운 산동네였지만 주민들이 길도 냈지 전기도 끌어들였지 공중 화장실도 지어가면서 스스로 공동체를 꾸려갔어요.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고 하니까 받아들일 수 없었죠. 우리 문제를 우리 힘으로 풀자는 의지로 어머니들 수백 명을 모아서 서울시장을 만나러 갔어요. 군사정권 시대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위였죠. 도시계획 관련해서는 아마 처음으로 열린 대중 시위였을 거예요. 그 뒤로 창신동에 가이주단지를 만들도록 합의를 받아냈고 순환재개발 방식으로 원주민들은 새로 지은 아파트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주민운동사에 길이 남을 ‘우리가 지역의 주인’이라는 김 고문의 뜻을 믿고 따라 준 창신동 주민들이 이뤄낸 성과였습니다. 그렇게 창신동 철거 사태가 해결되자 김 고문은 73년부터 난곡에 터를 잡고 난곡희망협동조합을 만드는 등 지역에 뿌리내린 빈민 운동가의 삶을 이어갑니다.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환히 꿸 만큼 난곡 주민들과 보낸 시간도 많았지만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는 철거 현장에도 늘 함께했습니다. 1985년 천주교도시빈민회를 만든 뒤에는 가야할 곳 부르는 곳도 넘쳐났습니다.
 
“철거된 곳은 안간 데가 없어요. 철거당했다고 새벽같이 전화오기도 매일반이었죠. 세입자한테 가이주단지와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찾아주는 성과를 여러 싸움을 치르며 남길 수 있었어요. 특히 세입자 가운데 거주기간이 모자라 아무 보상 없이 쫓겨나는 사람들의 권리를 찾아주느라고 더 피터지게 싸웠죠. 그렇게 싸워서 얻어낸 내용들이 다 법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어서 여전히 철거민들의 싸움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죠.” 
 
▲     © 조혜원
재개발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철거 용역’입니다. 경찰을 등에 업고 폭력을 일삼는 용역은 늘 철거민들한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재개발 현장에 처음부터 ‘용역’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개발 주체가 정부일 때만 해도 공무원들이 직접 다니면서 일을 치렀어요. 용역이 따로 없었죠. 개발 사업을 민영이 맡으면서 세입자들을 쫓아낼 명목으로 용역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86년 상계동 철거 때 처음으로 용역이 나타났는데 80년 말에는 돈암동 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용역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기도 했죠. 그 때 현장에 함께 있었어요.”
 
80년 전까지만 해도 정부의 도시 개발 사업은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주택 공급’에 큰 비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택 사업이 ‘공영’에서 ‘민영’으로 바뀌면서부터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철거민들의 불행이 본격으로 시작됩니다. 
 
“80년대부터 ‘불량주택개량사업’이 ‘재개발’ 정책으로 바뀌었어요. 그 배경은 이래요. 70년대에 큰 기업들이 중동에 진출을 많이 했는데 개발이 끝나니까 그 많은 장비를 쓸 곳이 없잖아요. 건설업체가 놀고 있으면 정치권에 돈이 돌아가지 않아요. 그래서 만든 정책이란 게 주민이 조합을 만들어 시공업체와 함께 주택개발 사업을 시행하는 ‘합동재개발’이에요. 엄청난 개발 이익은 돈 있는 사람들이 가져가고 가난한 사람은 쫓겨나는 악순환이 이때부터 계속되고 있죠. 주택 보급률이 110%가 넘는 지금도 집 없는 사람이 전 국민의 반이 넘어요. 개발 정책이 재벌들 자본 축적을 위한 도구라는 사실이 명백해 지죠.”
 
재개발이 낳은 이 악순환의 구조를 어떻게 하면 깰 수 있을까요? 집 없는 사람들을 중심에 둔 주택정책만이 가장 확실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주거 정책은 모든 걸 돈으로만 취급을 하니까 갈등을 조장하고 싸움도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굶어죽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보금자리가 없어서 죽어나가는 이 현실은 분명히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투기를 위한 개발이 아니라 집 없는 국민을 위한 주거정책이 필요해요. 공공주택을 많이 짓고 세입자 처지를 대변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특히 세입자들이 만든 대책위원회는 법으로 인정을 못 받아요. 조합이 필요한 건 오히려 그들인데도 가옥주가 모인 조합만 법이 인정하는 것부터 큰 문제죠.” 
 
난곡에서 30년 넘게 살아 온 시간은 김 고문한테 ‘난곡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안겨주었습니다. 난곡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91년 첫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구의원에 당선된 것도 발이 닳도록 주민들을 만나며 지낸 시간을 대신 말해줍니다. 난곡도 재개발 광풍을 비껴가지는 못했지만 김 고문이 뿌린 주민운동 씨앗이 밑거름이 되어 큰 충돌 없이 재개발 사업에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순환식 재개발은 물론이고 철거 대책에서 배제된 거주 기간 미해당자 가구를 위한 대책도 이끌어 냈습니다. 5년 전 난곡을 떠난 김 고문은 지금도 난곡 주민들과 한 달에 한 번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방송에라도 나오면 전국에서 전화가 와요 반갑다고. 난곡 근처에 가서 거리 연설이라도 할 때면 내 목소리 알아듣고 집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죠. 난곡은 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게 해 준 제 2의 고향이에요.”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을 바라보면서 개발사업의 문제는 지역과 빈곤의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역과 빈곤 그리고 개발이라는 그물망 속에서 30년 넘게 살아 온 김혜경 고문의 마지막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간절히 와 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인간적으로 단절된 주거문화 속에 살고 있어요. 특히 아파트가 더 그렇죠. 문 닫고 들어가면 끝이에요. 집단으로 사람은 모아놓았지만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 생활은 오히려 안 되는 거죠. 삶에서 주거환경이 깨끗한 것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자기가 사는 그 자리에서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항상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문명이 발달했다지만 사람의 가치가 자꾸만 비하되고 왜소해지는 이 현실이 안타까워요.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어떤 철학적 가치가 다시 생겨야 할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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