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잘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우산을 펼쳐드는 그들의 모습이 싱그러웠다.
 
그날 이후 두어 달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 세밑이다. 어려워진 경제 여건에서 팍팍한 삶을 지탱하는 서민들은 고달프다. 고층아파트가 올라가지만 들어가 살만한 형편이 안 된다. 맞벌이 하는 부모들은 아이들과 지낼 시간이 부족하고 사교육비를 들일 수도 없어 마음만 무겁다.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한 실업과 퇴직에 대한 공포 다가오는 노년에 대한 두려움 기댈 곳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대다수 서민들이 큰 걱정 없이 먹고 입고 자고 아이들을 키울만하지 않다. 지역아동센터에 지급하는 정부보조금이 삭감되었다는 소식에다 다문화축제 지원금이 없어졌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어려운 때일수록 ‘복지’ 기관의 역할은 크다. 얼마 전 녹번복지관 주거복지센터에서는 보증금 이백만 원이 없어 싼 월세조차 들어가지 못한 지체장애 3급의 70세 노인에게 긴급 임대료를 지원했다. 그는 정부 생계비 삼십여 만원으로 연신 고시원에서 매달 27만원을 주며 혼자 살고 있다. 주거환경이 열악한 12가구 저소득 가정 집수리도 해 주었다.
 
은평구에는 약 1000명 가량의 결혼이주여성이 있다. 녹번복지관은 결혼 이주 여성 자조모임인 ‘어울림’을 통해 낯선 땅에서 외로움을 겪는 그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준다. 지역아동센터 구름다리 교실 한부모를 위한 감수성 훈련 등은 아이들과 부모에게 웃음을 찾아준다.

복지관은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날마다 약 500~700명의 주민들이 직접 방문하고 사회복지사들은 지역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닌다.
 
녹번종합사회 복지관은 1996년 개관하여 YMCA가 수탁하여 운영하다 복지관장 횡령 혐의 내부 갈등으로 재위탁에서 탈락한 후 2003년 사회복지법인 기독교 대한감리회(양광 교회)가 위탁 운영하고 있다.
 
녹번복지관은 종합사회복지관으로서 가족복지 재가복지 지역복지 교육복지 외국인근로자센터 주거복지센터 등의 일을 한다.
 
지역아동센터 방과후 야간시간 수급자 저소득층 아동들의 안전한 보호 및 교육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꿈꾸는 반딧불이’ 결식ㆍ빈곤아동의 문화접속 자아성장프로젝트로 ‘랄랄라~♬ 문화원정대’ 이혼가정 자녀 및 자모관계 증진 향상을 위한 개인상담 아동집단 자모집단 가족통합 프로그램인 ‘사랑의 울타리’ 어르신 급식 지원 밑반찬 배달 정서지원 보건의료 지원 노인성문화지원사업 다문화지원사업 복지 네트워크 활동 주거복지센터 운영 등 하는 일이 참 많다.
 
오은석 관장은 복지관의 이런 활동을 디자인하고 총괄하는 사람이다.
 


▲ 오은석 녹번종합사회복지관장. 옆에 결재서류가 잔뜩 쌓여 있다.     © 은평시민신문
오은석 관장 그는 누구?


목회자로 복지 기관을 맡아 지역사회와 교감하고 있는 그는 이 분야에서 ‘젊은 세대’에 속한다. 그런 그가 “지역 일꾼들을 재생산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다음 세대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 진지한 고민과 에너지가 쏟아져야지 우리들만 하다가 사그라지면 위기 아닌가?”라고 말한다. 그는 “조금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좀 다른 방향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품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고민한다.
 
다음 세대를 고민하는 그의 청춘 시절 그의 현재를 떠받치는 과거는 어땠을까? 질문 하나를 툭 던지자 그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술술 이야기가 쏟아진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편안하게 풀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언뜻 했다.
 
그는 목사가 아니라 보육원 생활지도 교사가 되고 싶어 감리교 신학 대학에 들어갔다. “책 속에서가 아니라 삶속에서 가르치는 일을 해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
 
한신대와 감신대는 87년 당시 신학대학 가운데 학생운동이 거셌던 곳이다. 그 한가운데서 몸살을 앓았다. 목회자의 길이라는 이정표 없이 신학 공부를 하며 정체성의 혼란도 겪고 데모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훌쩍 10년 세월을 보냈다.
 
‘보육원 교사라는 푯대를 세우고 사회복지 시설에 가더라도 신학을 바탕에 두면 변질되지 않을 것.’ 이라고 조언해 주는 목사님도 있었다. 그러나 “교단 내 보수 진보 다툼 목회자들의 실망스런 행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상반된 모습을 가까이 보며 나도 똑같이 저렇게 되어야 하나 저 길을 가야 하나” 고민하며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보육원 생활지도 교사의 꿈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봉사 활동도 했다. 18세가 되면 60만원으로 자립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아이들을 보며 자신도 50만원에 월 10만원 사글세방에 자취를 시작해 주말이면 아이들 데려와서 같이 지냈다.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여는 모습이 달랐다.
 
그러나 “현실에서 미혼모 이혼 부모가 늘어나고 가정이 깨져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보며 뒤치다꺼리만 할 게 아니라 예방이 중요하지 않나” 고민했다. “소박하게라도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가정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직접 보여주고 그 힘으로 치유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자각과 기존 목회자들에 대한 “오기도 생겼고” “제대로 된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고민을 하며 교회로 되돌아 왔다. 목회자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한 순간이다.
 
첫 목회지인 수유리 백운교회는 장애인 현실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장애인들에게) 제대로 말도 걸지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보조하는 일이나 하고 식기도 겨우 갖다 주기만 할 뿐 도망 다녔다.’
 
그런 그에게 충격적인 한 장면 남녀 구분 없이 머리를 깎아 놓은 장애인들을 군인들이 화장실에 데려다 준 후 “벗겨 봤더니 여자더라”며 낄낄 대고 있는 게 아닌가! ‘인권’도 없고 ‘인간적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장애인 현실이 그의 감수성을 건드렸다.
 
이후 그는 12년 동안 장애인 자립모임에서 공부하며 활동했고 장애인 직업재활 기관인 ‘굿윌의 한국 비전 프로젝트’의 멤버로 추천을 받는다. 아시아에서 다음 100년을 이끌어 갈 비전 플랜으로 시도되었다는 굿윌 사업은 교파를 초월했다.
 
그는 “굿윌 사업은 ‘아름다운 가게’와 흡사하고 그 모태가 같다.”고 설명한다. 그는 굿윌 사업이 “한국적 풍토에서 정착이 되지 않는 신뢰의 문제 생겼다.”며 “장애인들을 위해 일을 한다는 명분을 드러내기 원하고 실질적으로는 그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 모습에 실망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장애인 직업재활이 아니라 교회나 교단의 명분에 치우치고 장애인 복지에 관심 있다기보다는 교회 선교에만 치중하는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였다.”고 매섭게 지적했다. 그가 이 일을 접은 이유다. 이는 은평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     © 은평시민신문
부드러운 리더쉽 두루 소통하는 그만의 방식


2005년 말쑥한 청년(?)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시민단체들을 찾아와 ‘지역사회와 잘 소통하고 싶다’고 말을 건넸다. 당시만 해도 복지관은 준 행정 기관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역의 변화를 위해 함께 고민을 나누자고 찾아 온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로부터 3 년가량의 세월이 흘렀다.
 
복지관 지역팀 직원에서 관장으로 역할이 달라졌지만 예의 그 모습은 여전하다. 직접 대추차를 내오는 소탈함 누구나 어깨 툭 건드리며 인사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편안함이 묻어난다. 그의 미소를 보면 ‘개구쟁이 소년(?)’의 느낌이 난다. “어렸을 때 개구쟁이여서 말썽부리는 아이들이 다 이해가 된다.” 고 말하는 그 하루 내방객 700명 50 여명 직원의 수장이라기보다 그들의 친구 조력자다.
 
‘복지관에서 몇 명이나 일 하는지’를 묻자 “정규직만 32명이고 강사 치료사 등 비정규직이 있다. 윤리경영을 하자고 하면서 안타깝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하는데...”라고 한다. 그는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해 본 경험이 직원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사회복지사의 근무여건이나 대우가 열악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직률도 높다. 녹번복지관의 한 사회복지사는 “상대적으로 다른 복지관에 비해 오래 근무한 사람들이 많다. 분위기가 좋다.”고 말한다.
 
오은석 관장은 어느 때 만나도 직원들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사업을 말할 때도 ‘00가 제안하고 00의 생각이 녹아있고 00가 추진력을 갖고 일한다.’고 말한다. 그는 “직원들을 믿고 일을 맡기니 그들 스스로 아이디어를 쏟아낸다.”며 연신 칭찬한다. ‘다문화사업’이 대표적이다. 
 
“신입 직원 뽑을 때 관장이나 직원이나 1/N이다.”며 “권한을 내려놓고 현장 팀의 의견을 듣다보니 마음도 편하고 늦게 가긴 하지만 건강하게 조직이 움직인다.”며 그게 녹번복지관의 문화가 아닐까 라고 덧붙인다. 그는 이전 김종윤 관장이 문턱을 낮추었다면 그 문턱조차 없애 직원들과 거리감을 좁혔다고 자부한다.
 
그는 국제 표준화 기구에서 서비스 품질을 인증해 주는 IS 국제 인증을 받고 싶다. 복지관 자체 평가를 하지만 주관적일 수 있어 서울복지재단 부산 두성복지관 광주 오치 복지관처럼 국제적인 평가를 받아보고 싶은 것. 또 청소년 사업과 다문화 도서관 사업을 해보고 싶다. 그러나 직원들이 힘들겠다 싶으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기다린다고 한다.
 
개구쟁이 소년이 장난감으로 블록을 쌓으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온갖 장난감을 재조립하고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꼬마 악동처럼 그의 사업 구상은 일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보인다.
 
▲ 인터뷰 도중 복지협의체일로 전화를 받고 있다. 복지기관 관장 가운데 젊은 세대인 그는 다양한 실무도 많이 챙겨야 한다.     © 은평시민신문
복지관이 지역사회 새로운 신뢰 모델로서 다양한 것을 담아냈으면 하는 바람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약자의 편에 서 목소리를 내는 지역 내 리더쉽이 아쉽다고 하자 도봉구에서 문익환 목사 문상을 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맞다. 그러나 찾지만 말고 (우리가) 맡아야 하는 과제와 고민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걸 어떻게 풀어갈 지가 지역사회의(우리의) 숙제”아니겠느냐는 것.
 
그는 “복지관이 가르침이 살아있는 곳으로 다양한 것들을 담아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며 “기타의 음들 기타 줄을 튜닝하듯이 지역사회의 다양한 소리 활동을 튜닝하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오지랖 넓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실험과 시도를 해보는 중이다.”고 말한다.
 
최근 도봉구 방아골 종합사회복지관이 사회복지관 평가에서 2003년 우수복지관 2006년 최우수복지관으로 선정되었음에도 재위탁 심사에서 탈락한 경우가 있었다.
 
오 관장은 “정부 보조금을 받아 일하다 보니 복지관들이 지역 사회에서 주도적으로 나서 일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풀뿌리 시민단체들의 몫이 있고 거기에 힘을 실어주고 관심 갖는 것 자원 활동가들을 지원하고 도와주는 일이 지역 사회를 위한 복지관의 역할”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는 은평구가 자생력을 갖춘 지역 일꾼들이 많아져 지역사회가 건강해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오 관장은 서민주거권을 위해 같이 싸워 줄 수는 없지만 실질적인 밀린 임대료 임대아파트 주택 집수리 등을 알아봐 주는 주거복지센터 이주여성 인권을 위해 맞서 싸울 순 없지만 의료적 지원을 하고 가정폭력에 개입해 주고 생활지원과 적응을 위한 교육을 하는 등의 다문화센터 등이 있다고 말한다.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일은 누군가 대신 해 줄 것이라는 기대로 지역사회 일을 찾아가고 있다고 다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앞으로 녹번종합사회복지관의 역할에 대해 “동마다 노인복지센터가 지어져 노인복지의 부담은 줄어들고 있다.”며 “재개발로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을 지역사회에 아우르고 유입되는 문화를 어떻게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지 지역사회 문화 컨텐츠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복지관이 지역사회 새로운 신뢰 모델로서 어려운 분들만이 아니라 시골 마을의 느티나무처럼 어른들 가르침이 이루어지고 놀이터가 되고 사랑방이 되었으면 한다. 종합사회복지관이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풀고 도움 받을 수 있는 만남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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