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날이 장날이네요.” “어머 이런 곳도 있었네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은평시민신문 사무실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시간도 아낄 겸 택시를 타자고 했다. “괜히 돈 쓸 필요 있어요. 걸으면서 이야기하면 좋잖아요.” 알뜰함이 배어 있다. 덕분에 3월말 따스한 평일 오전의 봄볕을 맞으며 15분 거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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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학원비 마련 위해 한 일
이날 승이 씨는 오후에 초등학교 1학년인 막내가 다니는 학교로 학부모총회가 있어 가야한다고 했다. 총회에 나가면 아이들 책을 공짜로 받아올 수 있다고. 그래서 오전에 짬을 낸 것이다. 승이 씨는 증산동 토박이인 남편과의 사이에 3남매를 두고 있다. 1 2 3학년 연년생이다. 24살에 같은 직장을 다니던 남편과 만나 결혼했다. 열심히 일하고 속이 깊은 모습에 반했단다. 다년간 평범한 가정주부로 아이들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그러다가 이랜드 홈에버 월드컵점에 캐셔(계산원)로 들어간 것이 2004년도다. 아이들 피아노며 미술 학원 하나라도 더 보내기 위해 택한 길이었다. 70~80만 원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아이들 학원비를 뺐다. 또래에 뒤처지지 않고 아이들의 재능을 채워주고 싶어서였다. 여느 엄마들과 다를 바가 없다.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했고 그때마다 불안했지만 고정수입이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했다. 회사는 택시비를 지급하지 않기 위해 연장근무 5분을 앞두고 퇴근을 강요하는 억울한 일도 다반사였다. 다리가 아파도 앉지 못하고 화장실을 마음대로 못가는 것도 참을 만 했다. 승이 씨는 불평 없이 잘 따지질 않고 일에 적응을 잘 하는 성격이었다. “근무시간 연장 해줄 수 있냐가 아니라 ‘연장해’ 한마디였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포스(계산대)를 열면 계속 일하고 닫으면 일을 멈춰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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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파업이 길어지면서 아이들 피아노 수영학원도 다 끊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가 힘들다고 하니까 이해는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이들한테 미안한 일이 계속 생긴다. “엄마 시키는 대로 왜 안해. 응.” 보채는 아이들이 분풀이 대상이 된다. 그럴 때면 말하고도 미안하다. 정작 자신이 부당한 대우에 참고 복종하는 것이 미덕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당당하게 살려면 부당함에 항의하는 가르침이 더 필요할 듯 해요.”
남편과의 위기도 있었다. 처음에는 잘 이해해주던 남편이 투쟁이 2~3개월 계속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 한창 엄마가 필요한 아이들 걱정과 아내가 힘들까봐서이다. 이럴 때 맞불작전은 위험하고 승산도 없다. 승이 씨의 위기 대처법은 짐짓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무 베기라는 데... 지금도 조용히 집에서 나와 투쟁현장에 결합한다. 이런 아내의 행동을 남편도 잘 안다고 한다. 알면서 넘어가는 속 깊은 정이다. 남편 칭찬 뒤에 승이 씨의 애교 섞인 투정도 이어진다. 동네에서는 팔짱도 안 끼는 남편이 야속하다고. 아이들 엄마가 예쁘고 귀여워 보이는 순간이다.
9개월 동안의 투쟁은 승이 씨를 더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개개인이 ‘노동자’란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식이 많은 것 같아요. 노동자라 그러면 왠지 ‘하류’이미지랄까요.” 내가 말을 받았다. 홍세화 선생이 늘 강조하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의 문제군요. “그런 어려운 얘기는 잘 모르겠고요...”(웃음)
즐겁고 좋아해서 일 하는 세상
승이 씨는 몇 차례 뒷풀이 자리에서도 기억에 많이 남는 분이다. 초창기에는 이렇게 물었다. 뭐하시는 분들인데 이렇게 열심히 연대를 해주시냐고. 혹시 돈 받고 하는 것 아닌가? 앞장서 열심히 싸우는 이들은 (돈을) 더 받는 것으로 오해했다고도 했다.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안다고 했던가. 연대란 그런 것이다. “그런 오해하는 조합원들 지금은 없겠죠.”(웃음)
몇 달 뒤에 만났을 때는 눈을 휘둥그렇게 하는 질문이 있었다. “노동해방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리를 옮겨가며 묻는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내 답변은 이랬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상을... 어쩌고저쩌고. 지금은 답을 구했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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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를 바라기 전에 현장의 조합원들이 먼저 깨우치고 적극 참여해야 해요.” 점점 줄어드는 집회 참여 조합원들로 인해 힘이 빠지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도 승이 씨의 한마디 한마디는 동료 조합원들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 있다.
“너희들 지금까지 한 일이 뭐가 있어?” “(연대 투쟁하러) 지방가라면 갔어. (점거농성 시)자라고 할 때 잤어?” 답답해서 내뱉는 누군가의 숱한 말들이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평가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미안한 마음이 있더라도 공격을 받으면 보호하고픈 것이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공격적인 발언이 미워서 ‘차라리 안나오고 말지’하는 조합원들도 있다고 한다. “지도부를 믿고 옆에 동지들을 믿고 뒤에 오는 이들은 끌어당기고 같이하려는 노력이 중요해요.”
김건모의 ‘핑계’란 노래를 좋아한다는 승이 씨.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노랫말을 웅얼거린다. 현재 이랜드 노조와 노동자의 모습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승이 씨는 분명 자라고 있었다. 마치 대나무가 마디가 있어 높이 자라는 것처럼. 누군가 노동운동을 해왔고 지금은 우리가 그 바통을 받아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평범함’을 좌우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승이 씨. 2시간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번뜩이는 말들은 평범함 속에 담긴 비범함이 엿보였다. “반드시 정든 일터로 돌아갈 거예요.” 이랜드 투쟁이 승리해 노동자들이 복직하는 날 산을 좋아한다는 승이 씨와 산행을 같이하고 싶다. 하산 길에 파전에 막걸리 한잔도 걸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