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환(42) 씨는 고집이 세 보였다. 인터뷰 내내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와 흔들림 없이 논지를 펴는 모습이 그런 인상을 줬지만 무엇보다 살아온 삶이 그랬다.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 통일운동을 한 것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가 연루된 사건에서 선고받은 무거운 형량은 옳은 것을 틀리다고 말할 줄 모르는 ‘고집’ 때문이었다.
1.5평 좁은 감옥 문을 열고 나온 지 3년 6개월. 감옥에서 보낸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국가는 그를 여전히 ‘고집스런 김경환’으로 남게 했다.
▲"이런 내면의 고통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대상자가 출소 후에도 똑같은 감시와 압박을 매일 당한다면 강간당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김진아 |
그는 보안관찰처분대상자다. 민족민주혁명당사건으로 3년 9개월의 형을 살고 출소한 그는 출소 전 후 신고 등을 이행하지 않아 보안관찰처분대상자로 머물러 있다. 형사로부터 수차례 신고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납득할 수 없는 몇 가지 의문들 때문이었다.
“왜 신고의무를 이행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았어요. 2003년 광복절특사 명단은 이미 언론에 공개됐고 저 역시 몇 차례 인터뷰를 하기도 했어요. 쉽게 말해 나의 출소를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인데 굳이 경찰서에 제 발로 가서 신고하는 불필요한 행정절차를 하게 하는가 또 그 불필요한 행정절차를 따르지 않으면 왜 법적절차로 구속시키고 벌금형을 주는가에 대해서 고민한 거죠. 1주일간 고민했어요. 그러다 결국 이런 생각에 다다랐어요. 보안관찰이란 법은 ‘길들이기에 불과하다’라고.”
그가 보안관찰법을 거부한 또 다른 이유는 이 법에 동조하는 것은 “민주시민으로서의 도덕과 의무를 져버리는 행위”여서다. 자신이 법을 따른다면 보안관찰법을 공고히 하고 결국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데 일조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곧 인권실천시민연대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소식지 오마이뉴스 등에 보안관찰법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혔다. 벌금과 구금을 무릅쓰고 거부한 보안관찰처분. 하지만 그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보안관찰자와 다름없는 감시와 압박을 받아야만 했다.
수차례 형사들이 찾아왔다. “우리의 입장이 곤란하다. 출소 후 신고를 해줄 수 없겠느냐”는 거였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경비원에게 몰래 동향을 묻고 수시로 담당형사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 “잘 계시죠?”라며 천연덕스레 말을 건네는 형사의 전화를 받으면 하루 종일 찜찜한 기분에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는 일도 다반사였다.
한번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이에게 “아빠 핸드폰 번호가 뭐냐”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보다 “아빠 형사가 전화번호 물었는데 내가 안 가르쳐줬어. 잘 했지?”라는 아이의 말에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 그가 보안관찰법을 거부한 또 다른 이유는 이 법에 동조하는 것은 “민주시민으로서의 도덕과 의무를 져버리는 행위”여서다. 자신이 법을 따 ©김진아 |
“국가는 매일 나를 강간하고 있습니다.”
보안관찰법에 의한 감시와 제재. 김경환 씨는 그것을 “국가에 의한 강간”이라고 표현한다.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 인간에 대한 국가의 폭력 그것이 보안관찰법의 실체라는 것이다. ‘국가에 의한 강간’이라는 표현에 또박또박 힘을 주며 말하던 그는 떠올리기조차 괴로울 수감 당시의 이야기를 꺼낸다.
“국가정보원이라는 무소불위의 기관에 체포돼 20여일 수사를 받았어요. 체포 되자마자 그들은 내 팬티를 내리고 항문에 좌약을 꼽았어요. 간첩사건연루자들은 항문에 흔히 자해용 독극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지만 내가 간첩이 아니었고 그런 독극물을 소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국가는 더 잘 알고 있었을 거예요. 좌약을 꼽고 몇 차례 용변을 보고 나서야 수사가 시작됐죠.…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수치심과 고통이 밀려옵니다.”
교도소에서 있었던 일도 덧붙인다. 구치소에 송치된 후 교도관이 수복으로 갈아입히며 알몸인 상태에서 플래시를 비추며 성기와 항문을 확인하던 일이나 검방이라는 명목아래 신발을 신은 채 들어와 감방을 마구 휘젓고 나가던 일 매일 아침 교도관이 감방을 지나가며 용변보는 모습을 봤던 일까지. 그리고 말한다. 보안관찰에 의한 감시와 압박은 이 모든 것을 떠올리게 한다고 감옥에서 당하던 일들과 지금 당하는 감시가 무엇이 다르냐고.
“수감되면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이 얼마나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과도한가 생각해 보세요. 그 수많은 상황들은 비록 직접 성기를 밀어 넣는 행위는 아니었지만 내게는 그것과 마찬가지인 강간으로 정신에 각인돼 있어요. 그런데 이런 내면의 고통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대상자가 출소 후에도 똑같은 감시와 압박을 매일 당한다면 강간당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살인이 따로 있나
출소 후 줄곧 신고의무를 거부해 온 김경환 씨에겐 이미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상황인 셈이다. 비록 김대중 정부 이후 직접적인 인신과 구속은 거의 없으므로 구속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감시와 행정의 불이익과 제한은 여전하다.
그는 이것을 ‘저강도 길들이기’라 말한다. 이전의 인신구속이 ‘고강도 길들이기’라면 육체적 구속이 아니라 다른 방법에 의한 제한과 불이익이 바로 저강도 길들이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저강도 길들이기 역시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폭력임을 강조한다.
“우리 모두가 악법이라고 규정한 국가보안법 그 법에 저항하고 넘어섰던 사람이라면 보안관찰법에도 똑같은 문제의식과 강도로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더 큰 몽둥이에 맞다보니 보안관찰이라는 회초리에 맞는 것은 통증이 덜 하다고 혹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국가폭력이라는 본질에 맞닿아 있는 이 법에 저항해야 합니다. 더구나 이념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신을 구속하는 이 법은 명백히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거예요.”
김경환 씨는 얼마 전 작은 문제에 부딪혔다. 대형운전면허를 취득하려는 그에게 형사가 현재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인 그의 면허취득은 불가능하다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물론 우여곡절 끝에 그는 대형면허를 취득했다.
하지만 보안관찰처분대상자인 그의 불이익은 여전하다.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초리로 각종 행정상의 불이익으로 정신적 압박과 스트레스로. 1.5평 감옥보다 어쩌면 더 잔인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김경환 씨. 그는 인터뷰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한 사람에게 독극물을 한꺼번에 먹인다면 그건 명백한 살인이에요. 하지만 그 독극물을 340년간 꾸준히 드러나지 않게 먹여서 죽인다면 그건 살인일까요 아닐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보안관찰법은 수십 년간 한 인간에게 소량의 독극물을 먹이는 국가의 살인행위라고.”
“괴물은 한강에만 사는 게 아니다” 보안관찰처분대상자 김경환의 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