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스물네 시간은 모두 지역과 연결돼 있었다. 지역운동에 몸을 던진 지 햇수로 벌써 10년을 훌쩍 넘어선다 했다.

어떤 생각과 인연으로 지역운동에 몸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87년 이후 사회운동의 전환점이 왔다고 생각했고 중앙과 지역 두 갈래의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공동육아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지역운동을 선택하게 됐지요. 어린이집이 섬처럼 고립된 형태로 운영해서는 안된다고 봤고 내 아이뿐 아니라 지역의 모든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 유환옥 위원

급식은 단순히 한끼 밥 아닌 철학의 문제

그렇게 지역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관여하는 단체는 열린사회 은평시민회 은평두레 생활협동조합 은평구 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본부 갈현초등학교 도서관운영위원회 등 10여 군데가 넘는다. 그와 은평지역운동은 역사를 같이 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그가 오래도록 역점을 두고 있는 분야는 교육이다.

“교육운동에도 두 갈래가 있는데 나는 대안교육보다는 공교육을 어떻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것인가에 관심이 더 많았어요. 도시 안에서 바람직한 학교를 실현해 보자는 거지요. 초등학교 운영위원을 하면서 공교육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할 일이 참 많다 싶더라고요. 교장 중심의 비민주적 운영 잘못되고 일방적인 관행 부조리와 비리가 많았습니다. 이걸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데 한번에 되는 일은 없었어요.”

꾸준히 오래 이것이 그가 지역운동을 하면서 터득한 원칙이다. 의식과 관행을 바꾸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이다.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갈현초등학교 도서관 개선사업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모범 사례라고 한다

“교장의 일방적 지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서 개선 방안을 찾는 거죠. 도서과제 같은 경우도 대부분의 학교에서 업체가 로비를 해요 2백50권 도서목록을 갖고 오면 그 중에서 1백권 정도를 선정하고 업체는 이를 납품하고 증정도서를 제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발전기금 명목으로 리베이트가 오가고 증정도서를 구입한 것으로 장부를 꾸미는 겁니다. 책이 1만권 있으면 뭐합니까. 학생들에게 정작 필요한 도서는 없는데요. 갈현초등학교 도서관은 증정도서를 폐기처분하고 교사와 학부모가 도서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바꿨지요.”

요즘 학부모들의 최대 관심사는 급식문제가 아닐까. 잊을 만하면 터지는 급식사고와 비리사건을 접할 때마다 학부모나 학생은 참담함과 분노를 누르기 어렵다. 급식 문제 또한 유 위원이 오랫동안 개선을 위해 노력해온 분야다.

“학교급식 네트워크가 2002년 주장하고 제출했던 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가 이번에 집단 식중독 사건이 나면서 졸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학교장단 협의회라고 있는데 임의단체지만 힘이 막강합니다. 교육 문제의 최대 걸림돌이 이 단체라고 할 수 있는데 교장들이 하고 싶어도 이들 눈치 보느라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들이 두고 봐라 정권 바뀌면 법 바꿔서 위탁으로 바꿀 수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이번 법안이 아쉬운 점이 많지만 몇 군데라도 직영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급식 문제와 관련된 쟁점은 많지만 본질은 철학에 있다. 학부모가 할 일을 학교에서 대신해서 아이들에게 한끼 밥을 먹이는 것으로 보느냐 급식도 교육이고 사회 전체의 시스템과 연결된 문제라고 보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맞습니다. 결국 철학의 문제입니다. 교육부가 급식은 교육이라고 지침을 내리지만 대부분의 학교장들은 한끼 밥 먹이는 귀찮은 일로 생각합니다. 급식이 아주 중요한 교육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비만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비만에 따른 의료보험 손실이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12년 동안 고른 영양을 공급한다면 이를 예방할 수 있고 그만큼 사회적 비용과 손실을 줄일 수 있다는 거지요. 또 음식과 건강 사람과 자연 바른 먹을거리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지요. 급식이 단순히 한끼 때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인 관계라는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 급식은 직영과 위탁 방식이 있는데 초등학교 전체와 지방 중고교의 대부분의 경우 직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제는 서울시에 소재한 대부분의 학교가 위탁방식이라는 점이다. 이번에 개정된 법에는 직영방식을 권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위탁 방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왜 이렇게 바뀌기가 어려운 것일까. 리베이트 때문이라는 게 유 위원의 생각이다.

“내부 고발자가 없는 한 밝히기 어렵겠지만 핵심은 리베이트예요. 한 학교당 급식 예산이 7억에서 10억 정도 되는데 5퍼센트가 거의 공식 리베이트라고 합니다. 이것을 학교 발전기금으로 쓰기도 하지만 사립의 경우 이 돈이 재단으로 들어갑니다. 위탁은 한 업체가 3년간 계약해서 급식 전반을 관리하지만 직영은 1년 계약에 쌀 육류 생선류 야채류 공산품 하는 식으로 여러 업체를 선정하니까 비리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지요. 또 정부에서 영양사와 조리사를 지원해 주니까 납품업체 눈치를 볼 이유가 없지요. 여러 검증 단계를 거치는 직영체제로 전환하면 급식의 질이 훨씬 개선될 수 있습니다.”

신뢰와 지속성이 지역운동가의 덕목

그는 오전엔 주로 출판사 업무를 보고 오후에는 지역운동으로 분주하다. 10여 군데의 단체 일을 하느라 은평구 관내를 벗어나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동네 일이라서 틈틈이 짬을 내서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참여하는 단체 중에 갈사모 곧 ‘갈곡리를 사랑하는 주민모임’이 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동네 모임인데 그동안 해온 일에서 지역운동의 뜻을 새겨볼 수 있다.

“지금의 갈곡리 공원 자리가 원래는 쓰레기 분리처리장이었어요. 그곳에서 아이들이 본드도 하고 불장난도 하고 그랬는데 화재 사고도 몇 번 났지요. 지역주민들이 이런 점을 개선해 달라고 하면 구청은 무응답으로 일관했어요. 그래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갈사모를 만들고 서명운동을 벌여서 구청에 어린이공원개선안을 냈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바로 1억5천만원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지요. 갈곡리 공원에서는 봄 가을에 축제도 하고 영화제도 하고 바자회도 합니다. 행사 때마다 5백 명이 넘게 모일 정도로 활발한 편이지요. 또 공원을 점유하던 불법시설도 철거해서 부지를 확보하고 청소년 도서관과 녹색가게를 유치했지요.”

이때 이웃과의 소통 주민이 참여해서 함께하는 운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몇몇 뛰어난 활동가가 리더십을 발휘해서 끌고 가는 운동이 아니라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이 나서서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것이 진정한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번 5월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후보를 내보내고 이를 지원한 것도 지역운동을 하다가 느낀 한계 때문이라고 한다.

“시민운동 하다보니까 한계를 느낄 때도 많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관과 시민단체와 주민의 삼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많은데 정보공개도 안하고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구청 공무원들이 시민단체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과 주민들이 경제적 가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주민들에게 당장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먼 미래에 더 큰 이익이 온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서도 지역정치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이번에 무소속 후보가 실패했지만 거기서 얻는 교훈이 크다고 한다. 그리고 20년을 내다보고 계속 실험하고 도전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의 관심은 지역정치가 더욱 활성화해서 적어도 광역과 중앙 정치가 분리되는 것이다.

“양당 정치가 자리 잡은 조건에서 무소속은 역부족이었습니다. 정치는 힘과 권력이고 정당이 아니면 공약을 이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지요. 개인적으로는 당신들 뜻에 동의하지만 현실성이 없어서 정당을 선택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지요. 나주나 과천 같은 몇몇 지역에서 성공 사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도시의 경우 4년이면 유권자의 50퍼센트가 이동을 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몇 번의 선거를 거치다보면 소득이 있겠지요. 대가가 비싸지만 그래도 선거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알리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도 되니까요.”

독점된 것을 나누자는 분권화가 그가 생각하는 정치의 이상이다. 지금보다 더욱 나누고 나누어야 좋은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더 많이 권력을 나눠야 합니다. 분권화를 해서 나쁠 것이 없습니다. 나는 교사들이 중앙공무원이 아니라 지방 공무원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 지역에 애정을 갖고 아이들을 돌볼 수 있지 않겠어요? 또 국정교과서가 아니라 지방자치 교과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지역을 알고 사랑하게 되지 않겠어요? 다른 지역에 불편을 주거나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는다면 지역의 자치역량을 계속 높여 나가야 합니다.”
▲ 유환옥씨

‘동네 사람’의 꿈 도시 안에 고향 만들기

지역운동을 하는 그의 바람은 소박하다. 도시 안에 고향을 만들자는 것이다. 고향이라는 단어마저 빛이 바래는 시절 그는 그게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거나 크게 보상이 있어서 지역운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아이가 성장해서 고향으로 생각할 만한 곳을 만들어 주고 싶은 겁니다. 차가 없어서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거리 자연이 살아 쉼쉬는 녹색환경 한 학년에 서너 학급만 있는 작은 학교 같은 걸 만들어서 아이들이 마음의 고향으로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향을 가진 아이라면 나중에라도 지역을 기억할 것이고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요.”

유 위원은 인터뷰 내내 나직하고 차분하게 열심히 말을 이어나갔다. 항상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유 위원이고 지역운동에서 보람과 성장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론 한계와 답답함도 생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여전히 제자리거나 더디 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돌아보면 같이 하던 사람들이 함께 늙어가고 새로운 피가 더해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착잡함도 느낍니다. 그래도 20년 전에 비하면 많이 발전해 왔고 주민 참여가 많아진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지역운동이 자기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냐고 묻자 유 위원은 예수를 떠올렸다. 모태신앙인 그에게 종교는 어려울 때 큰 힘이 됐는데 여러 가르침 중에서도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간 예수의 삶이 큰 가르침이 된다고 한다.

“예수가 몸으로 보여준 삶 이론이 아닌 구체적 실천에서 힘을 얻습니다.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공간에서 내 능력껏 쓰여진다면 만족합니다. 주변에 보면 능력 있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내 역할은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이런 분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해 온 일이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유 위원은 지역운동을 하는 사람이 갖춰야할 덕목으로 신뢰와 지속성을 꼽는다. 대개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데 그렇게 해서는 지역주민들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고향을 꽃피우고 싶다는 그에게서는 은평구라는 지역에서 오래도록 밭을 일궈온 농사꾼의 저력과 뚝심이 느껴졌다. 그를 만나보면 지역운동은 어쩌면 농사짓는 일과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게 기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시장통을 소처럼 느릿느릿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동네 사람’의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김경환씨는 대학시절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성남과 울산 등에서 금속 용접노동자로 일했다. 이후 월간 <말> 정치팀장으로 활동하던 중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수감생활을 했다. 얼마 전까지 인터넷신문 <코리아포커스> 취재부장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권영길과의 대화> <비상을 꿈꾸는 새는 대지를 내려다 본다>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분단시대와 사회와 자아를 통합하는 대안적인 삶을 고민하며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은평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