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실천시민연대]라는 인권운동 단체에서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열리는 '수요대화모임'에 참석했다.
강연할 사람이 성공회대 교양학부 고병헌 교수라는데 무엇보다도 그가 은평구 주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에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늦게사 글을 올리게 되었으니 나의 게으름과 태만의 끝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교육운동의 철학적 기반평화교육]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던 그의 강연을 듣고 난 후의 소감은 한마디로 '이 이는 평화교육사상의 전도사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강연할 때의 모습에서 받은 느낌은 강연에 익숙한 교수로서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신부나 성직자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간곡함'이었던 것 같다.

어떤 대목에서는 약간 흥분하기도 하는 그의 강연의 요지를 한마디로 정리해 낼 재주는 없지만 간단히 그의 말을 옮긴다면

"제도권 교육운동의 문제점으로 '철학의 부재'를 지적할 수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교육철학으로서 '평화'를 설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평화교육'을 교육운동의 철학적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결국 평화교육이란 우리의 아이들이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만드는 것' 즉 '감동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인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과연 지금 내가 가르치기 위해 뱉는 말이 내 자신을 먼저 감동시켰는가 그래서 내 삶 속에서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교육은 삶을 잘 살게 하는 것'이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쉬운 명제를 이야기하는 고병헌 교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떻게 교육이 희망일 수 있을까?"라는 화두를 쉽게 지나치지 않은 탓에 오늘의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은 의식화다."라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그에게 오늘의 교육현실은 엉뚱하게도 "적성은 성적이 이야기해 주는 것"이기에 더욱 교육이념의 중요성을 붙들고 늘어진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대안교육'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안학교'의 역사가 꽤 오래 된 것 같아 다시 확인하는데 불과 십 여년 전인 1995년에 '대안교육 한마당'이라는 워크숍에서 그가 처음 대안교육이란 말을 썼고 그후 '간디학교'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삶의 궤적이 궁금하지 않으신가.
그는 1980년 보성고를 졸업하고 1981년고려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다가 3학년에 마지막 학도호국단장을 지내면서 총학생회의 부활을 위해 노력한 결과 이듬해 총학생회가 부활되는 성과를 맛보기도 하였다.

85년도에 졸업하고 도미유학 길에 올라 아메리칸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수여받고 이후 영국 글래스고대학 런던대학 등지에서 박사과정을 밟다가 고려대학교에서 '평화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왜 교육에 관심이 있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재수할 때에 데모주동 건 때문에 피해 다니던 이화여대 선배를 만났는데 그가 그때 말하기를 다시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면 교육학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결국 교육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는 거지요. 그 선배의 영향으로 나중에 야학 선생도 하고 소록도 봉사도 가게 되었지요."

요즈음 관심사는 '평생교육'라고 한다.
평화라는 것은 '사회통합'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텐데 오늘날의 지식기반 사회에서는 지식이 부의 원천인데 평생교육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취약한 이 부분을 메울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최근 한겨레를 비롯한 언론에서도 성공회대학교 교수들을 주축으로 "노숙인다시서기 지원센터"라는 것이 만들어져 그곳에서 노숙인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고 기사가 난 적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직업훈련만이 아니라 교육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인문학적 교양과 상상력에서 반성적 성찰적 사고가 비롯되고 그래야 단순한 숙련공 수준이 아니라 창의적 일을 해낼 수 있고 세계화의 대오에서 낙오되지 않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고 보는 것이다.
▲ 부인 김미영씨

그의 가족관계가 궁금하다.
그는 1987년도에 고대 영어교육과 83학번 후배인 김미영씨와 결혼했다.
부인 김미영씨는 지난 번 '이런 곳이 있었네'라는 꼭지의 기사에서 품앗이유치원이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품앗이유치원 및 '엄마사랑공부방'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김미영씨는 또한 학창시절 노래패 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석화'로 시작되어 나중에 '노래얼'로 바뀐 노래패에서 활동하였다.
85년도에는 국내 최초로 불후의 명곡 '광야에서'를 부르기도 하였으며 4학년 때부터는'새벽'의 멤버로 안치환김광석 씨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큰 아이는 현재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 1학년에 다니는 중이고 둘째는 선정중학교 2학년에 다니는 중이다.
큰 아이를 '풀무학교'에 보낸 이유에 대해서는 큰 아이가 중학교때 공부는 잘 했으나 지각을 밥 먹듯 하고 백지시험지를 내는가 하면 "왜 빨간 양말을 신으면 안 되느냐" "왜 파마를 하면 안 되느냐"며 수시로 문제 제기를 하는 등 제도 학교에 부적응 현상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부모 욕심이 아닌가도 했는데 지금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어서 아주 잘 보냈다고 생각한다고.
▲ 몇 해 전 찍은 가족사진
그가 은평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신사동에서 목욕탕을 운영하셨던 부모님을 따라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사를 와서 지금껏 같은 집에서 지내고 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던 그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지금은 막내 아들인 고병헌씨 가족과 함께 지내고 계신다.

그는 술을 안 한다.
아니 못한다. 건강 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체의 술 담배를 안 하는 관계로 나 같은 사람이 만나기는 약간 맹숭맹숭하다.
그래서 기사 내용이 알차지가 못하다.
순전히 기자의 문제이나 어쨌든 한 잔 들이키며 나누는 깊은 속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지 못한 것 같아 아쉽기 짝이 없다.

어쨌든 그가 앞으로 평화교육 사상의 전도사로서만이 아니라 지역의 발전에도 관심을 가지며 보다 많은 활동을 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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