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암동 '각시와 신랑'미용실 원장 손미경씨

'부지런하고 욕심 많은 그 여자가 드디어 일을 저질렀다. 영화 카피를 슬쩍 훔친다면 '발견 시대의 저술' '재발견 오늘의 손미경' 으로 흥분할 만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발로 뛰어 만든 책'이란 바로 이런 저작물을 일컫는 말이리라. 책갈피를 손으로 훑어 내리기만 해도 금방 땀방울로 흥건해질 것같다.
이 방대한 저서는 저자가 20년 넘게 영화 현장과 텔레비젼 드라마의 분장팀 그리고 자신의 영업장을 오가며 쏟은 열정의 소산이다.'

- 영화평론가 박평식의 <한국 여인의 髮자취 >(손미경 지음) 축간사 중에서


별 학력도 학문적 경험도 없는 어느 미용실 원장님이 쓴 책의 좀 호들갑스러운 축간사. 한국 여인들의 헤어스타일 역사를 정리한 이 책에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러는 것일까. 이번 회에 소개되는 [은평사람]은 어찌보면 책 광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미용실 광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 책은 동네 미용실 원장의 광기어린(?) 집념의 소산인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 그 집념의 주인공 손미경씨가 있다. 그녀의 결실이 있다.



"그러니까..1979년부터였어요. 영화판에서 헤어스타일을 맡은 스텝이었죠. 고구려 적 고주몽에 관한 영화였는데 주몽의 어머니는 도대체 어떤 머리를 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지더군요.."

척 보기에도 성질 급해 보이고 고집센 행동주의자 같은 이미지의 손미경씨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무섭게 그 무구한 사연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영화판에서 이 웬수를 만났지요..호호.."

여기서 웬수는 그녀의 남편인 촬영감독 이은길 씨.

"암튼 처음엔 밑도 끝도 없이 고전 사극을 하면서 감독님이 이 머리를 재현해라 하는 오더에 충실하려고 시작을 했어요. 고전머리 연구. 물론 처음엔 연구니 공부니 그런 개념이 아니었는데 작업을 하다보니 그저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고전 머리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줄곧 지금까지 주변에서 '또라이'소리를 들으며 고전머리 공부를 하고 있죠.. 내 팔자야.."

그녀는 촬영감독인 남편의 뒷바라지 겸 '먹고살기'위해 미용실을 개업하고 프리랜서로 방송국의 헤어스텝과 영화스텝 일을 겸업했다고 한다.

그녀는 사극의 머리를 재현하는 작업을 하면서 고전 복식사는 있는데 체계적으로 정리된 한국 헤어스타일의 역사가 없다는 데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그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시작할 때는 몰랐지만 그 의구심이 한국 누천년 유행을 체계적으로 고증해내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아휴..그때 고생한 거 생각하면..월화수목은 도서관을 출입했어요.. 정사든 야사든..뭐 뺄 게 없었어요.. 처음엔 뭐든지 귀중한 자료였으니까 근데 저 웬수 먹여살리느라고.. 아휴 저 양반 밖에서는 호인이다 성자다 그러는데 몰라서 하는 소리지 원..같이 살어봐봐..죽여버리고 싶지..호호..암튼 나머지 금토요일날 빠마하고 컷트하고 하면서 돈벌고 그랬죠."

손미경씨는 그나마 5000원짜리 컷트와 파마를 죽도록 해서 번 돈을 생활비 빼고 고스라니 공부에 투자했다고 한다.

"뭐 안가본 도서관이 없었어요. 국회도서관 서울대 도서관..근데 정말 서러운 거 있죠..학자도 아니고 무슨 사단법인 같은 단체도 아니고 자료 확보하려고 책 사진 찍으려면 도서관 관리들에게 욕먹고.. 미용실 원장이 왜 책 사진을 찍느냐고.."

그녀는 고증을 위한 자료 확보를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어찌됐든 '문화사'고 역사책을 쓰기 위한 것이니 국가의 후원을 구했지만 역시 학벌도 단체도 없는 일개 동네 미용실 원장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노라고 토로했다.

"어찌됐든 갖은 수모 끝에 자료 수집은 어느 정도 끝났죠. 그런데 막상 이걸 미용하는 후배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려니까..막막하더군요.. 모두 한자체 고어체로 된 용어들을 일반인이나 미용하는 후배들이 알아먹을 수 있도록 용어를 한글세대에 맞게 바꿔야 했어요.. 이것도 정말 큰일이었죠..."

손미경씨는 그 예로 '천'이 '하늘'로 말해지듯 계림유사의 동심계를 쪽머리라는 어휘로 바꾸었다는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였다.(구체적인 고증으로 풀어낸 설명이었지만 기자의 무지로 메모하기조차 불가능했다.)
그녀는 '고증'에 대한 이야기를 한 김에 내쳐 그 사례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각 지역의 설화를 고증하고 정착하는 작업에 들어 갔지요. 예를 들어 신사임당의 머리 모양을 재현한다고 할 적에는 신사임당 영정 그림을 보게 될 거 아니예요. 그래서 영정그림을 척 보니까.. 이게 그 시대의 머리가 아닌거야.. 그건 조선 개화기때의 머리 양식이었어요.. 그럼 어떡해 영정그림 그린 사람을 찾아가 사실 확인작업을 해야지.. 그래서 그냥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사진을 찾아가지고서는 그 머리양식의 근거가 뭡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얼렁뚱땅 그린 거지 뭡니까.. 말이 돼요 적어도 신사임당 사당에 걸린 영정 그림이.."

그녀는 이런 방법으로 고증에 고증을 더해 더이상 확인할 수 없을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고 한다. 그녀가 단지 머리양식 고증을 위해 봤던 고전문헌들은 종종 사학자들의 문헌해석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많은 사례가 있었지만 기자의 무지로 일일이 옮겨적지는 못하였으나 대략 이런 식이었다.

"춘향전이 약100여 종류가 있어요. 그 중에 최남선판에 보면 '서궁왕 옥잠 용비녀'라고 있는데..춘향이는 숙종때 사람이잖아.."

"논개도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중략) 아버지가 주달문이고 작은 아버지가 주달평이었어요. 그런데 그 논개를 작은아버지가 부양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그 작은 아버지가 논개를 팔아 먹었지요...(중략) 그런데 논개의 영정 그림이 '장수'하고 '진주'에 있어요 ..(중략) 그 친일화가 이은호 화백이 그린 논개 영정 사진을 보니까 또 아니더라구요.."

"송강 정철이 사랑한 기생이 있었는데.."

폭포처럼 쏟아내는 손미숙씨의 이야기들. 한국여인들의 머리양식에 대한 연구를 하다보니 그녀는 어느새 고려-조선시대의 '여인사'까지 꿰어차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지역문화재 이야기까지 번져간다.

"저기 원당에 있는 최영장군 묘 있잖아요. 그게 원래 중국 송-원 교체기때 '굴개'라는 사람이 원나라가 망하는 걸 보고 싶으니 길거리에 내 묘를 써 다오.. 그래서 최영장군도 조선이 망하는 걸 보고 싶으니 저잣거리에 나를 묻어다오..라고 해서 거기 묘가 쓰이게 된 거라고 하더군요...."






이야기 중간에 그녀의 이야기를 기록하느라 진땀을 내고 있는 기자가 측은했던지 부군 되시는 이은길씨 참견을 한다.

"에이 손원장 좀 천천히 설명해..받아 적지도 못하잖어.."

손미경씨 "아이구 이 웬수 은길씨는 좀 가만 있어봐봐."라고 도리어 핀잔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역사 역사 하는데 그렇게 역사인식이며 문화인식 있다는 문광부도 분통 터져 죽겠더라구요.. 동북공정 이야기 나왔을 때.."

기자 지식의 한계로 이번에도 그 이야기를 제대로 받아 적지 못했다.

"중국 25사 중에 구한서와 구당서를 보면 "고려양"과 '부녀수건"같은 부분에서..(중략) 분명한 증거들이 철철 넘치는데 그걸 조목조목 반박도 못하고 있으니.."

무한히 쏟아지는 정보의 양을 감당하기 어려운 기자 손미경씨의 이야기를 끊고 '그래서' 이 책이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해달라고 부탁한다. 손미경씨 왈

"사실은 '오기'예요. 내 두 아들에게 미용사도 공부를 한다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 이런 거죠.. 아까도 말했지만 주위에서 또라이짓 한다고 욕도 엄청나게 먹었어요. 심지어 신랑이 뼈빠지게 촬영해서 벌어온 돈 카드 몰래 훔쳐다가 자료 모으고 진행하고 머리카락 재료에 거기 끼울 악세사리 구입에 다 써버리고.. 남편 신용불량자 만들어 버리고 죽을 힘 다해 가지고 책을 만들었더니 출판해 준다는 곳은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가게며 집이며 저당잡혀서 3000만원 들여 자비로 출판을 했지만.. 미용하는 후배나 문화사 연구하는 학자들 빼고 누가 이 책을 봐요..그 빚 갚을려고 중국으로 갔었죠.."

손미경씨는 중국의 모대학에서 그녀의 연구 실적으로 강의를 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잠시 이별 했었다고 한다.

"한 몇 년 중국에서 돈 벌 생각을 했었어요.. 한국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가족과 이별하는 거 무릅쓰고.."

그런데 기적처럼 중국에 온 지 삼일만에 모일간지에서 그녀의 책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그길로 다시 짐을 싸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도서관 비치용으로 문화관광부에서 1000만원 어치를 사줬어요.. 그나마 다행이지..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고생해서 만든 책을 한국에서 알아봐 주기 시작한거죠. 머리양식이라는게 사람들이나 혹은 학자들에게 우습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거예요. 그 스타일을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알 수가 있어요. 문화사적으로 중요하다는거죠."

그건 지당한 말이다. 교과서적인 역사는 지나칠 정도로 '왕조'의 역사 '권력'의 역사다. 남성 위주의 역사요 거대담론적인 역사다. 극단적인 표현으로는 죽은 역사다.





"그래서 돌아왔더니 몇군데 신문사랑 방송에서 쪼금 이런 책이 나왔다고 보도해 주더군요."

책이 나온 후 전통문화사 연구자들이 손미경씨에게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장 70여 명의 교수석박사 들이 그녀의 자문을 구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논문에 그녀의 연구를 무단도용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교수님들이니학자들이니..너무 쉽게들 공부하는 것 같아요. 저요? 그렇게 공부하고 파마 컷트하고..파김치가 될 양이면 편히 쉬지도 못하고 공부한 걸 토대로 작업실에서 혼자 그 머리들을 재현했어요."

가채머리 등 2미터는 됨직한 머리를 땋고 빗고 손질하고 청계천 등을 돌아다니며 악세사리까지 손수 제작을 하고 잠을 잤다고 푸념하는 손미경씨. 그녀는 역시 머리양식 연구자문화사학자 이전에 장인이었다. 책에 보여질 고전머리양식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작업과정에서 그녀의 손은 엉망진창이었다. 글루건에 데인 흔적들 가위질로 인한 흉터들. 장인 손미경씨의 손 자체가 거짓없이 살아있는 역사였다. 기자 후학들에게 이 산 지식들을 물려줄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왜 아니겠어요..우리 미용실 직원들한테도 본의 아니게 악덕업주가 됐어요. 한가지 전통양식에 심지어 그 양식에 정확한 장신구까지 그날 배운 걸 마스터하지 않으면 14시간이건 15시간이건 퇴근 시키지 않았어요. 그런 악덕업주 하나 믿고 10년 이상씩 장기근무해준 직원들이 고마울 따름이죠.."

기자 직원들 외에 개인적으로 고전머리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없느냐고 물었다.

"몇 명 있었어요. 오면 한 2년은 미용실 잔심부름이나 하라고 그랬어요. 고전머리..쉬운게 아니거든요..끈기하구..알고 싶다는 일념..학문적으로 더 배고프게 만든 뒤에
그래도 하겠다면 본격적으로 가르칠려구.. 왜 무술 배우러 간 제자에게 싸부님이 몇 년동안 나무하고 청소하고 그런 것만 시키잖아요..그 이유를 알 것 같더라구요..일단 정말 하겠다는 의지..그게 정말로 중요한 것 같더라구요..호호.."

그녀는 재작년에 은평구의 신성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하자마자 미용과 강사를 시작했고 다시 3학년 편입으로 원광 디지털대학 학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한다. 6월1일부터 6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에서 고전머리 전시회도 연다고 한다. 정말 정신없는 인생이다.



손미경씨. 그녀는 여전히 응암동 미용실에서 컷트와 파마를 하고 두 아들을 키우고 남편 바가지를 긁는 전형적인 동네 아주머니이다. 치열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기자 손미경씨를 통해 다시 치열한 삶을 배운다. 인터뷰를 끝내고 찬찬히 손미경씨의 책을 보았다. 박평식 평론가의 발간사가 호들갑이 아니구나.. 그녀의 집념에 비하면 기자는 얼마나 호사스럽고 평안하고 나른한 인생을 살았는가. 손미경씨의 책은 그녀의 욕망 스스로 배우고 알고 손과 발로 실천하고자 하는 그 뜨거운 집념의 발자취 바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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