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사람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씨

'독도' 요즈음 대한민국 여론의 주인공. 지역신문 동네신문인 은평시민신문도 이러한 대세와 시의성에 발 맞추어 가지 않을 수 없을 터 가급적 지식인이나 유명 인사를 지양하고 장삼이사 무명씨들의 소중한 삶을 지향하다는 기획 의도에서 약간은 벗어나 한 사람의 '전문가'를 찾아 보기로 했다.

여기 한 사람의 장삼이사의 개인임과 동시에 민족과 역사라는 무거운 중책을 띤 어느 '은평사람'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실장 박한용씨 이다.

'지역공동체'에서 '민족문제'라는 거대담론 앞에 맞닥뜨린 기자 당황한다. 청량리역 근처 떡전교 사거리의 민족문제연구소 간판을 보고 막막한 한숨. 그러나 어쩌랴 사무실 문 을 연다.

긴장은 잠시 박한용씨는 예일여고 뒤편에 사는 어느 은평사람으로서 기자의 긴장을 풀어 주었고 가장 편안한 인터뷰로 이끈다.

"글쎄요..제 개인 이야기라..뭐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지방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대학 다니고 대학원 나와서 어찌어찌 하다보니 여기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그 '어찌어찌 하다 보니'에 관한 이야기를 부탁한다. 박한용씨는 웃으며 이야기를 꺼낸다.

박한용씨는 본인의 표현으로 '보수의 고향'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물정 모르는 시골 소년이 문학과 역사 중 어느 쪽을 택할까라는 갈림길에서 결국 '사학과'를 택하고 1979년 대학생 교복을 입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도 자랑스런 '고려대' 교복 말이다. 시골 소년이 겪은 대학은 부산 동네와는 완전히 딴 판이었다고 한다. 규율과 복종에서 벗어나 그 무서웠던 선배들마저 친절한 선생님의 지시없이도 스스로 돌아가는 '자율'이라는 흥미로운 세계 말이다. 그는 '자진 근로반'이라는 동아리(그 당시 표현으로 써클)에 가입했다.

"뭐 학부 때야 운동권이니 그런 종류가 아니었습니다.
자진해서 노가다 뛰는 서클이었죠 뭐..허허.. 5.16이후 흩어져 있던 농촌활동 써클과 야학 서클이 통합된 순수 봉사 동아리였는데 비정치적인 학구파들이 주축이 된 보수적 써클이였죠."

그러나 은연중에 그는 나와 사회 지식인과 민중이라는 스스로 처해진 관계망 속에서 사회와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을 느꼈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날 당시 문과대 서관에서 시간 차임벨로 울리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라는 노래가 없어졌어요. 그리고 성북지서의 사복 경찰들이 교정에서 포카를 치고 수강생이 많은 강의실에 들어와 버젓이 같이 강의를 듣더군요."
그의 표현대로 국가적 아버지 박정희가 저 세상으로 가고 어느덧 그 해 5월이 왔다고 그는 말한다. 5월의 광주.

"사태가 그 지경까지 되었는데도 근로반 선배들은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믿고 기댈 곳이 없어졌어요. 믿었던 선배들에 대한 실망뿐.. 왜 내가 데모를 해야하는지도 모르면서 울면서 혼자 데모했습니다. 80년 소위 '서울역 회군'때 말이죠.아무 것도 모르던 대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허무하더군요.."

청와대까지 진군계획을 세웠다가 '회군'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2학년을 마치고 방위병 생활을 했다. '방위'였지만 역시 군대 조직 문화의 억압성을 못 견뎌했다고 했다. 제대 후에 친척 형과 잠시 옷장사를 하면서도 그는 꾸준히 야학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야학에는 노동운동적 야학과 검정고시 준비를 위한 야학이 있었죠. 저는 나름대로 봉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가르쳤지만 오히려 나의 행위가 죄악이라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야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그들에게 별다른 희망을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이니 신문이니 미디어에서 찾아와 어두운 곳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운운하며 사회 모순을 은폐했습니다. 주연이 되어야 할 민중은 오간 데 없고 엘리트인 야학 선생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며.. 그 때야 저는 오히려 당시 권력에 내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야학을 그만두고 취직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 무역회사에 면접을 봤다고 한다.

" 무역회사 면접 때에 데모해봤냐고 면접관이 묻더군요. 저는 당연히 했다 그랬습니다. 또 그 당위성에 대해 면접관에게 역설하다가 면접관과 대판 싸웠죠."

그는 하는 수없이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고 그때야 이제껏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며 읽었던 책의 몇 소절을 시 구절 외듯 암송한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장미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그들이 저주받은 것은 아니다'
'인간적으로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소나무다.'

그는 절구들을 읊으며 웃는다.

"보수 언론들은 반일 과거사 규명을 말하면 다 빨갱이 운운 하더군요. 사실 일제시대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비판적으로라도 맑스와 대면하게 됩니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서야 비로소 '실천'에 대해 깨달았노라고 밝힌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늦게 배운 도둑질에 아직 밤 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하하.."

그는 대학원 총학생회 결성에 기획부장으로 가담 4.13 호헌조치 때 총장 이사장실 점거 및 가두시위에 가담하는 등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이어 작금의 사태에 대해 언급한다.

"일본의 우경화야 두말할 여지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민족 내부의 우경화죠. 알만한 소위'지식인'들이 드러내 놓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축복 운운 하는 저변에는 과거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이 깔려 있습니다. 박정희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시스템화 한 그 현상들이 반공이 곧 애국이라는 작금의 현상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한승조니 지만원이니 김완섭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사 청산은 반대하면서 독도 문제에서만 반일을 외치는 보수 언론이나 정당들의 이중 잣대에 감춰진 파시즘이 훨씬 더 무섭습니다.
한승조지만원이야 논리에 일관성이라도 있죠."

그는 인터뷰 중간 중간에 각 방송사나 신문사에서 걸려온 듯한 문의 전화를 여러 통 받는다. 기자 눈치도 보이고 해서 인터뷰를 마무리 하려고 하자 그는 이것만은 꼭 전해야 한다고 수첩을 접던 기자를 만류한다.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서 나서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작년에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벌이고 있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대한 정부 예산이 전액 삭감 됐습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봅니다. 이름은 없지만 양식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사업은 '보복'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릇된 과거의 유산을 되물림 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시민 주체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진실'을 규명해야 합니다.
"

그는 기자가 사무실을 나서며 악수를 나눌 때까지 강조한다.

"역사는 나라의 일기다. 그것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다"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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