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극장과 은막의 낭만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세계 만방을 웃기고 울린 그 영화는 꼬마 영화광 '토토'가 훗날 감독이 되어 고향마을 영사기사 할아버지 '알베르토'와의 우정을 그린 '영화'에 대한 헌사였다. 독자들의 기억 한켠에도 비 내리는 스크린과 퀴퀴하고 습한 냄새가 나던 동네의 재개봉관의 풍경 그 극장에서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담배 꼬나물고 어른 흉내를 내며 가슴 졸이며 보던 아련한 추억이 있을 법도 하다. 편리하고 쾌적한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빽빽이 대세를 이룬 요즘 은평 우리 동네에 그 한켠의 추억과 낭만을 떠올리게 하는 극장이 있다.

구청 쪽으로 가다보면 눈에 띌락말락하는 어찌보면 작고 볼품 없는 극장. 이 작은 극장에 유일하게 눈길을 끄는 면모가 있다면 요즘 보기 드문 극장의 간판 그림이다. 이번 [은평사람들]에 소개하는 사람은 은평에서 살아남은 유일의 동네극장 '도원 극장'에서 간판 그림을 그리는 이금석 씨이다.

지은 지 30년이 넘었다는 도원극장의 뒷편 남색 철문을 열면 그곳이 이금석씨의 작업장.
좁고 어두운 게다가 하얀 입김이 서릴 정도로 추운 그 작업장에서 인터뷰 시작이 무섭게 기자는 이렇게 추운 곳에 왜 변변한 난방기가 없냐고 안부부터 물었다.
이금석 씨는 작업장 구석의 작은 전기난로 곁에 앉기를 권하며 "그림 건조상태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혹여나 도원극장 사장님의 근무조건에 대한 몰매정함을 걱정했던 기자는 안심하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고요하고 따뜻한 눈매의 소유자 이금석 씨는 1940년 생으로 고향은 전라도 구례다. 그는 고등학교를 서울로 유학 와 졸업 후 중앙일보 판매부 교직 생활 등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고교 때부터 열망했던 미술을 배우기 위해 나이 서른이 넘어 '아더'라고 불리는 이태리계 미국인 문하에서 유화를 배우며 화업을 시작했다.

그는 유화기법을 마스터한 뒤 당시 청량리 세무서 근처에 작업장을 차리고 200여명의 화가들과 함께 소위 '이발소 그림'으로 알려진 수출용 그림을 그렸었다. 그는 그곳의 대표로 그림의 오리지날 샘플을 그렸으며 한때 활황을 누렸다고 했다. 그러나 홍콩-중국산 덤핑(?)그림에 밀려 그림 수출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사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영화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단관 개봉 체제에다 동네마다 재개봉관이라든지 동네극장이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그는 조수 1명과 함께 한 달에 7~8군데 극장의 간판을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 적부터 3~4년전 사이에 무려 400~500 군데의 동네 극장이 줄도산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아마도 극장들이 큰 기업화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래요 그러니까 서민경제가 사라지면서 우리같은 동네 극장들은 대기업 극장에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

이금석 씨 말대로 불과 몇 년 전부터 영화당 1벌의 프린트를 가지고 개봉하던 단관 개봉관이 점차 사라지며 메가박스나 C.G.V 같은 미국식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체인화된 멀티플렉스는 동시에 200여벌의 프린트를 전국 각 도시에 융단폭격 하게 되고 동네 극장이나 재개봉관들은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도원극장 측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상황은 현재 진행 중이며 상암 C.G.V가 개관한 이래 매출의 70~80%가 감소하게 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격경쟁력으로나마 살아남아 보려는 의지로 관람비를 1000원 더 낮췄다고 극장 측은 설명했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광동에 오픈 예정인 팜스퀘어 쇼핑몰 내에 C.G.V가 하나 더 개관하는 까닭에 앞으로의 극장운영이 불투명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전까지 현상유지만 되도 극장은 계속 운영해 나갈 방침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렇게 운영 형편도 어려운 상황에서 단가가 싼 실사출력으로 영화 그림을 만들어 걸어도 될 텐데 굳이 인건비가 많이 드는 화가를 왜 고용했을까. 이금석 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 극장 사장님(권동춘씨)이 극장이 극장다워야 한다면서......그렇게 말합디다. 실사출력 그거 거저 해준대도 안 건다고 극장간판은 그림으로 해야 극장이 극장 같아지는 거 아니냐구요. 허허"

이렇듯 대세를 거스르는 무모한(?)사장님에 대해 이금석 씨는 몇마디 자랑을 더 늘어 놓는다.

"나도 예전에 200여명 거느리고 작업장 운영을 해봤지만 우리 사장님한테는 인간적으로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직원들이 애로 사항을 말하기 전에 그걸 해결하고 말로만 수고한다고 하는게 아니구..허허.. 오실 때마다 꼭 수표 몇 장을 주머니에 넣어주고 가십니다."

언뜻 보기에 힘들고 고단해 보이는 이 일을 그는 매우 만족한다고 한다. 작업장 가득한 옵셋잉크 냄새와 접착 화공약품 냄새 하얀 입김이 팍팍 서리는 이 추위에도 말이다.

"재미있습니다. 그림 그리는 게. 건강에도 오히려 좋습니다. 서서 움직이는 일이라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건강 상태는 똑같더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을 시작한다. 기자도 미대 출신인지라 그림에 대한 질문을 미주알 고주알 해본다. 이렇게 스케일도 큰 데다가 정확한 데생을 필요로 하는 그림인데 영화 한 편을 그리는 데 며칠이나 걸리느냐고. 그는 아무런 자랑도 으쓱함도 없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한다.

"한 2~3일 걸립니다. 개봉 스케줄이 갑자기 변경되면 하루만에 그려야 할 때도 있구요."

큰 스케일에 정확한 데생에 그 무서운 속도라니. 속으로 놀라며 그림에 필요한 영화 자료는 무얼보고 그리냐고 다시 물었다.

"영화사에서 스틸사진을 보내줍니다"

이금석 씨는 영화사에서 보내준다는 스틸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준 스틸사진과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과는 많이 다르다. 스틸사진에는 덩그러니 주인공 한 사람만 나와 있지만 그가 현재 그리고 있는 그림에는 스틸사진의 주인공 외에 다른 스케치가 되어져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대로 보고 그릴 때도 있지만 영화의 스토리를 상상해서 그린다거나 할 때가 많습니다. 영화 간판의 목적은 영화내용이 한눈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일견 옳다. 영화의 서사적 기반 때문에 마치 고전주의 시대의 다비드나 앵그르의 그림같은 서사적인 그림을 그려야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가령 사진이 실수하는 부분이 있지요. 실물보다 실물에 안 닮게 찍히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인물의 얼굴을 사진과 다르게 그립니다. 배우 얼굴의 특징을 좀 더 부각시킨다거나 하는 방법으로요. 음 그리고 지금 상영하고 있는 마더 데레사 같은 경우는 자료 자체가 빈약해서 색깔을 바꿔서 몇 개의 데레사를 더 그려 넣었습니다."

"어떤류의 영화를 그릴 때가 가장 재미있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애정 영화라고 말한다. 서로 가까이 마주 보고 있는 두 남녀 주인공을 그릴 때가 그는 가장 재밌다고 자신의 상상력으로 그 남녀 주인공 주변의 배경을 그려 넣는다거나 할 때 그는 진짜 그림의 재미에 빠져든다고 했다.

"이거 할 말은 아니지만......" 그가 말하길 머뭇거린다. 말씀해보시라는 독촉에 그는 머쓱해하며 말을 이어간다.

"이 일을 하다보니까 스틸만 척 봐도 영화 스토리가 훤하게 보이더군요. 그래서 십여 년 전에 시나리오 공모전에 한번 작품을 써서 내봤습니다. 글은 잘 쓸줄 모르지만."

자못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떨어졌지요 전문가도 아닌데."

그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그가 한국전쟁 때 겪은 부역의 경험을 쓴 것이라고만 할 뿐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다. 그냥 예의 고요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웃기만 할 따름.


화제를 바꿔 이금석 씨 평소 일과를 물었다.

"실미도나 태극기 같은 대작들이 있을 적에는 그게 한 달 넘게 걸려있다 보니 일이 없어서 그냥 극장 직원들하고 농담이나 하며 놉니다. 월급이야 그래도 꼬박꼬박 나오니까. 허허. 영화가 손님이 없어서 금방 바뀌면 그만큼 더 일을 많이 하게 되는거구요."

문득 극장 그림 외에 다른 포트폴리오가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는 대답한다.

"음 저같은 경우 내 그림의 결과물에 신경을 안씁니다. 그림이란 게 사실 그릴수록 어렵더군요. 그림 결과를 남겨 보관하고 미련을 갖고 하다보면 그림은 더 이상 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돈오의 순간이 온다. 가장 매너리즘에 가깝게 여겨지는 영화 그림에서 그는 항상 그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그에게는 '작품'이라는 자의식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의 그런 내공이 노동의 즐거움을 아름다움으로 승화 시킬 수 있게 하는 진정한 '고수'의 면모가 아니던가.

그는 또한 실미도와 태극기 외에 몇 년 전 개봉했던 클리프행어(실베스타 스탤론의 산악 액션 영화)밖에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잘 안다. 그의 머릿속은 상상력으로 가득한 살아있는 극장이기에.

발터벤야민은 영화나 사진 매체를 주 소재로 쓴 소논문 '기계시대의 복제예술'에서 '아우라'에 대해서 언급했다. 영화 간판 그림은 기계복제 예술인 '영화'를 '손과 물감'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하나의 아이러니다.

구매체는 언젠가 신매체에게 주류의 자리를 양보한다. 현재에 비추어 디지털이 낫는니 아날로그가 낫느니 하는 이분법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참된 아름다움은 '소수자적'인 것에 있지 않을까.

전국에 5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영화 간판 그림이 걸리는 우리동네 도원극장(이런 희소성 차원에서라도 이금석씨는 무형 문화재감이다) 그 낡은 건물과 간판 그림과 이금석씨의 고요하고 따뜻한 눈에서 풍겨나는 역설적인 아우라.

그가 작업하는 모습에서 시인 마야코프스키는 무슨 연유로 떠오르는 걸까. 얼마 있지 않으면 이 모든 것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때문일까.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내내 이금석씨의 눈매는 기자의 뇌리 속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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