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만 선생
연신내에서 버스를 타고 15분정도 구파발역을 조금 지나 버스에서 내렸다. 한양주택 팻말이 보인다. 널찍한 길을 따라 들어선 순간 연신내의 북적거림과 탁한 공기 답답함이 몇 분 전에 내가 경험한 것인가 싶게 마음이 확 트인다
저 너머로 북한산 자락이 보이고 나지막히 예쁘장하게 들어선 단층 주택들.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숨쉬는 게 행복해진다. 어른인 나도 이럴진대 아이들에겐 이런 터전이 얼마나 넉넉한 마음을 안겨줄지 잠시 생각 해 본다.

풍란연구소를 찾는다. 한참을 두리번 거려 보아도 찾을 수가 없어 한종만 선생께 전화를 했다. 잠시 후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흰 수염이 더 없이 편안해 보이는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찾아 뵙겠다고 했을 때 스스럼없이 오라고 한 장소가 선생 집일 줄이야!
누구나 열 수 있게 되어 있는 낮은 나무 대문 위로 아치형의 조경이 더 없이 정겹다.

한양주택은 남북회담이 이루어질 때 북쪽 대표단에게 보여 줄 시범주택으로 79년에 지어졌다. 당시 원주민 30%가 재입주했고 50%이상이 지금도 거주하고 있다.
한종만 선생은 반포에서 전세로 살다가 아이를 키워주시는 어머니의 권유와 아이가 공기 좋고 쾌적한 환경에서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82년에 이 곳으로 들어오게 됐다.

재테크에는 관심도 없었고 여기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독주택의 사람 냄새가 나는 삶의 공간 담장도 없고 나즈막한 나무 울타리가 전부인 생태적인 마을 환경이 좋아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한국 플라스틱에서의 13년동안의 직장 생활을 접고 92년부터 난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여러군데의 난 동호회를 찾아다녔다. 쉽게 기술이나 지식을 내 주지 않는 풍토에서 다행히 한 곳에서 제자로 받아주어 6개월가량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일하며 전문지식을 익혔다. 93년경 좀 무리를 하여 벽제에서 농장을 시작했다. 이 때 한양주택을 잠시 떠나 아이들과 함께 비닐 하우스 농장 곁에 삶의 터를 꾸렸다.

▲ 한종만 선생댁
선생은 이 시기에 아이들의 성장의 밑거름이 된 여러가지 경험담을 오랫동안 말씀 해 주셨다. 성장한 아이들에 대한 옛 기억과 자랑스러움이 많이 묻어나온다.
벽제에서 구파발의 신도초등학교까지 통학하던 아이들 등교는 집에서 쓰는 화물차로 돌아올 때는 알아서 버스타고 학교를 다녔다. 오며 가며 북한산 자락을 보고 자연의 길을 걸으며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큰 자연의 혜택을 보았는지 동네 어른들 누구나 부모같고 선생이 되어주는 넉넉한 인정이 아이들의 품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농장이 수해를 입어 풍비박산이 됐을 때 아이의 친구들이 함께 와 구정물 속에서 복구를 도우던 때의 일 등을 어제 일처럼 생생한 듯 들려주신다.
비닐하우스 농장은 한겨울에 새벽이 되면 낮은 온도 때문에 기름이 어는 일이 잦단다. 온풍기가 고장을 일으키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비닐하우스에서 자는 아비를 걱정해 함께 자겠다고 나서는 초등 6학년의 아이를 보면서 아이가 제대로 자라 준 거 같아 뿌듯하셨단다.

자식자랑처럼 들리기 쉽지만 요즘 부모들의 자기 자식에 대한 과보호와 학원으로만 도는 아이들의 삭막한 환경 도심 속에서 아이들의 심성도 메말라 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선생의 고민이 묻어나는 말씀들이었다.

선생은 농장에 욕심을 부려 크게 벌리다가 낭패를 본 경험으로 "사람들이 적게 벌어 적게 쓰면 될 걸 넘 과욕을 부리는 게 문제지 이런 걸 진즉 몰랐다니 꼭 낭패를 보고서야 느끼니 말이야"라며 너털 웃으신다. 소박한 삶이 부의 추구만을 쫓는 세태에서 소중하게 느껴진다.

선생은 한양주택이 아이들의 재해율이 매우 낮은 좋은 공간이고 이웃과 격의없이 소통하는 삶의 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거문화가 권장되고 보존되기를 원한다. 공동체 속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되지 않겠냐는 말씀이시다. 지금은 머리 속으로만 생각하고 계시지만 여건이 된다면 아이들이 마을 신문을 만들고 마을의 일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건강함을 갖도록 어린이 기자단을 마을에서 꾸려보길 원한다.

은평뉴타운 개발 계획이 나오자 2003년 5월 214가구 한양주택 주민들은 기존의 통반장체계가 아닌 자발적인 "한양 주택 주민자치위원회”를 전 주민의 동의하에 만들었다.
내부 규약도 만들고 한양주택 존치를 위해 모든 주민이 함께 하기로 뜻을 모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온 집집마다 ‘한양주택 존치하라’는 노란색 깃발이 걸려 있다.

▲ 한양주택 존치를 주장하는 깃발
은평뉴타운 1지구 보상협의가 구체화 되기 시작할 즈음 몇몇 사람들이 도장을 빨리 찍으면 더 큰 평수를 준다더라 하면서 사람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한양주택 주민대책위원회 대표인 한종만 선생은 주민총회를 열어 대표인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물었다. 주민들의 생각이 소수에 의해 분열되는 걸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재신임을 묻는 방식으로 결속과 의지를 확인한 것이다.
내부적으로 흐트러진다면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지킬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진정한 주민자치는 나는 빠지고 누군가 대신 해 주길 바라서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싸움이 길면 3년이고 짧으면 2년인데 생활이 바쁘다고 가족의 생존의 문제를 뒤로 미루지 말자 하루에 10분씩만 마음의 은행에 저축해 두자 일주일이면 1시간이 되고 한 달이면 4시간이 되는데 그 시간을 공동체의 삶을 위해 투자하는게 그렇게 큰 일이겠는가 하며 전 주민이 한 달 4시간 정도만 함께 하여 주민 모임도 갖고 서울시에 항의도 조직하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자신감을 보이신다. 서울시의 철학이 없는 무분별한 개발 행정을 저지하고 주민의 삶과 생태적인 주거환경을 확보하는 것은 정당하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터널에 못 하나 박는 데도 주민의 이해를 구하는 기나긴 과정이 멍청한 행정낭비인 거 같지만 크게 장기적으로 봐서는 정말 현명한 일이다.”
“70년대식 밀어붙이기식으로 행정을 펼쳐서는 안된다. 현지 주민들이 감당할 수 있고 손해보지 않도록 하고 공공적 필요성이 있다면 설득과 대화를 통해서 주민들이 재입주할 수 있는 가능한 방향을 가지고 사업을 해야 한다. 30년 이상 그린벨트 제한에 묶여 어려움을 겪은 은평뉴타운 주민들은 서울시민들에게 녹지를 제공하고 그나마 나은 환경을 준 사람들이다. 공공성을 띤 보상은 필요한 거고 5년이든 10년이든 시간을 갖고 충분한 검토 속에서 최대한 지역을 세분화 시켜 제일 필요한 지역부터 제대로 주거공간을 만들자. 한 번 지으면 몇 십 년 후에도 가치있는 주거공간이 되도록”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선생의 눈빛은 빛났고 목소리엔 힘이 실렸다. 호주 록스마을이 원주민들의 삶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주민의 이해와 납득을 통해 만들어진 후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된 것처럼 우리도 이젠 이런 행정과 삶의 질이 필요한 때도 되지 않았냐고 말씀하신다. 선생이 말씀하신 내용이 현실이 되기를 한양주택의 싱그러운 공기를 맡으며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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