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을 찾으신 분 중, 지하철 2호선 모든 역사의 화장실 위치를 다 외우고 다니는 분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변의를 느꼈을 때 화장실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려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까 두려워 수많은 지하철 역사의 화장실 위치를 암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상에서 큰 불편과 고통을 느낀다고 호소했습니다. 특히 스트레스가 많거나 무리를 하면 복통과 설사가 잦아지고 심할 때는 출근길에 3~4회나 화장실을 찾지만, 용변을 봐도 시원하지 않고 아랫배가 무지근하면서 배에 가스가 찬 것 같은 느낌이 지속되어 대장내시경 검사까지 했지만, 검사 결
콧물이나 기침이 계속 있다고 환자들에게 진료실에서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담배를 피우거나 함께 사는 가족 중에 담배를 피우는 분이 있나요?”“아니면 혹시 반려동물을 키우시나요?”긴장하는 표정으로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대답하는 분들.“아, 그런데 저는 계속 키울 건데요.”저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지레 경계 태세를 보이는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다른 의사들에게 이미 다른 말들을 들으셨나보다 짐작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웃으면서 말씀드리죠.“네, 당연하죠. 계속 키우셔야지요.”‘나는 동물털 알레르기는
양쪽 눈 주위 피부에 발갛게 습진이 올라온 30대 여성분이 진료실에 오셨습니다. 1주일 전부터 심해졌는데, 너무 가렵고 이제는 하얗게 피부에서 비늘이 일어난다고요. 이럴 때 제 질문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1. 최근 눈 주위에 새롭게 바르기 시작했던 화장품 있으세요?2. 최근 눈 부위를 깨끗이 씻어냈던 적 있으세요?첫 번째 질문은 화장품에 의한 접촉성 피부염을 감별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쉐도우와 같은 화장품, 아이크림 같은 보습제들도 접촉성 피부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분에 특별히 알레르기를 잘 유발하는 물질이 없더라도 내 피부
배를 타고 먼 바닷길을 갈 일이 있었습니다. 파도와 조류가 심했기 때문에, 정원 3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스피드보트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바다에 처박히듯이 떨어지기가 반복되는 뱃길이었습니다. 몇 번 배를 따라 몸이 솟구쳤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허리가 아파, ‘이러다간 허리 나가겠는데?’ 생각이 들었습니다.저는 코어 운동을 할 때를 떠올리며 승마를 하는 것처럼 자세를 바꾸었습니다. 승마를 배워본 적은 없지만요. 배가 공중으로 떠오를 때 말이 장애물을 넘기 위해 뛰어오른다 생각했고 배가 바다로 떨어질 때 말이 장애물을 지나 땅으로
“이건 땀띠예요. 여름이니까 땀띠가 생길 수 있죠. 피부를 시원하고 건조하게 해주시고 보습도 많이 해주세요.”“네, 땀띠에 보습을 해주라고요?”“네, 땀띠도 일종의 습진이거든요. 보습을 해줘야 합니다.”“이렇게 축축한데 보습을 더 해주라고요? 습진에도 보습을 해줘야 해요? 건선에만 보습하는 거 아니에요?”진료를 하다보면 이런 오해를 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첫 번째 오해는 습해서 습진, 건조해서 건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줄 안다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습진에도 진물이 나는 습진도 있고 건조피부염이라고 하는 아주 건조한 습진도 있
얼마 전 살림의원에 간호학과 4학년 학생들이 일주일씩 차례로 실습을 나왔습니다. 숫자를 세어 보니 8주에 걸쳐 무려 50명이나 되더라고요. 그 사이에 살림의원에 오셨던 분들이라면 하얀 가운을 입고 분주하게 의원 안을 돌아다니며 코로나 백신 접종을 위해 어르신들의 문진표 작성을 도우거나 진료실 한 켠에서 긴장하며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이렇게 실습 학생들이 자주 살림의원에서 보이니 어떤 분이 넌지시 물어보시더군요. 학생들에게는 얼마의 실습비(교육비)를 받냐고요. 실습비는 거의 받지 않습니다. 간호대학에서 보내주는
코로나-19 판데믹 초기에 영국 사람들이 컴퓨터 바이러스와 진짜 바이러스를 잘 구별하지 못하여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다며 컴퓨터를 마구 때려 부수는 행동을 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괴담은 이렇게 부정확한 지식과 사람들의 불안에 기대어 생산되고 유통되어 사람들이 행동을 이상한 방향으로 조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곤 합니다. 그러니 코로나 판데믹도 문제지만, 괴담의 전파·확산·유통도 큰 문제라 인포데믹이라고도 일컫는 것입니다.한창 백신 접종이 진행 중인 한국에서도 아스트라제네카에 대한 괴담은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와는
제가 일하는 살림의원에선 만 12세 여자 아이들에게 일면 ‘자궁경부암 백신’이라고 알려져 있는 ‘인간유두종바이러스 예방주사’를 접종합니다. 이 주사를 맞을 때면, 아이들은 진료실에서 일종의 성교육은 들어야 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저는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려가며 열심히 ‘성교육’을 합니다.“자,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인간유두종바이러스는 사실 사마귀 바이러스랑 같은 종류야. 유두종이라는 게 사마귀거든. 이 바이러스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어떤 종류는 피부에 사마귀를 잘 일으키고, 어떤 종류는 자궁경부암이나 항문암, 구강암 같은 암
며칠 동안 지속된 복통으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소화가 잘 안 되고, 좀 더부룩한 느낌이 든다고 하셨어요. 장이 움직이는 소리가 조금 줄어 있어서 배를 이곳저곳 눌러 보았더니, 오른쪽 아랫배를 누를 때 약간 움찔하는 통증이 있었습니다.“혹시 맹장염(충수돌기염)일 지도 모르니, 응급실에 가서 CT를 찍어보는 게 좋겠어요.”“어, 맹장염이요? 저 그렇게 많이 아프지 않은데요.”“맹장염이 사실 아주 많이 아프지 않은 경우도 꽤 있어요. ‘수술하려고 보니까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미 복막염으로 진행했다’ 이런 얘기들 들어보신 적 있죠? 맹장염
이번 주 의사들의 커뮤니티 사이트에 ‘해외여행부족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코믹한 만화가 실려 있더군요. ‘그렇지, 코로나 시대에는 이런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이 많지, 나도 그렇겠지’ 싶어 웃프게 보았습니다.그러다가 문득 이번 달에 진료 받았던 몇 분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냥 여행이 너무 가고 싶어서 우울증에 걸릴 지경인 것 이외에도 실제로 면역력이 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부족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있다는 거죠. 바로 비타민D가 턱없이 부족해지는 분들이 이번 겨울 유난히 많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방문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아니다. 어떨 때는 진료실에서 일하고, 가끔 방문을 나간다. 나 이외에도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일하고 있다. 진료실에서도 진료하던 분들을 가정에서도 돌볼 수 있는 것, 반대로 방문해서 돌보던 분들이 회복된 후에 진료실까지 오실 수 있도록 하는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 우리의 방문의료이다. 진료실과 가정을, 병원과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바로 그 지점에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방문의료가 위치하고 있다.작년 코로나 초기에는 방문의료에 대한 수요가 조금 줄기도 했다.
우리 진료실에서 침대에 애벌레 인형이 하나 놓여 있다. 아이를 꽤 키운 조합원이 진료실에 오는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쓰라며 가져다주셨다. 신생아의 옆에 길게 놓아 아가들의 키를 재는 용도의 인형인데(맞다, 누구 집에나 있는 바로 그 인형이다!), 애벌레 마디마디가 색색깔이어서 예쁜데다가 만지면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나고 질감도 여기저기 달라 아이들을 이목을 집중시켜 달래기에 딱 좋다. 안겨주기에도 알맞은 크기라, 애벌레는 매일 열일을 하고 있다.그런데 진료가 끝나고 진료실을 나가야 할 때, 간혹 애벌레 인형과 함께 집에 가려고 하는
저는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딸 넷에 제일 아래로 아들이 있죠. 아버지가 종손이었으니 어떻게든 아들을 낳으려고 하셨던 게 사실이기는 하겠지만 부모님은 딸, 아들 차별하지 않고 키우려고 엄청 노력하셨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주변에서는 저희 남매를 두고 말들이 많았습니다.“아들 낳으려고 그렇게 딸딸딸딸 낳았어?”간혹 저에게 직접 말하시는 분도 있었어요.“네가 아들이었으면 너희 엄마 아빠 고생 안 하고 둘만 키우면 되는 건데, 넌 좀 아들로 태어나지 그랬어?”그걸 제가 어떻게 결정하겠어요. 그런데 세월이 30년 이상 흐르고
환자분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사실 갑상선암 진단받았어요. 그런데 수술은 아직 안 했어요. 아직은 암이 작으니 좀 더 기다려서 수술 날짜를 잡아도 된다고 해서, 3개월 후에 다시 초음파 검사 받아보고 결정하기로 했어요.”시선을 살짝 내리면서 담담한 듯 말씀하셨다.나는 그 모습이 안타까웠다.“아무리 갑상선암이 순한 암이라도 해도, 그래도 암인데, 마음이 아주 편하지는 않으시겠어요. 크기가 자라는지 아닌지 보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조금 초조하실 수 있어요.”순간 그녀가 시선을 들어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이 고
살림의원 같은 작은 동네 의원에도 산전관리를 위해 찾아오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산전관리라면 당연히 분만 전문 산부인과를 찾아갈 것 같지만 꾸준히 주치의 진료를 받아온 이들은 ‘나를 잘 알고 있는 의원’에서 이것저것 상담을 받고자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거든요. 그녀들은 진짜로 임신 전부터 상담을 신청하곤 하는데 임신을 하기 위해 어떤 몸을 만들어야 하냐는 것이 제일의 궁금증입니다. 뭘 먹어야 하지? 무슨 준비를 해야 하지? 당연히 맞아야 할 예방접종도 있고, 검사해 봐야 할 항목들도 있지만, 제가 따로 강조하는 것은 근력운동입니다.“
진료실에서는 예방접종을 좀 미루면 좋겠다거나 거부하려고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아이가 예방접종 후 아토피가 심해진 것 같아 미루고 싶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름 이유가 있지요. 하지만 그냥 막연히 예방접종 맞추기 무서워서 피하고 싶다거나, 예방접종을 통해 생긴 면역이 직접 그 병을 앓아서 생긴 면역보다 안 좋을 것 같아서 걸려야 한다고 믿고 예방접종을 건너뛰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예방접종에 대해서 평소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해서 말씀드릴게요.우선 저는 예방접종을 스케줄대로 맞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기증 얼마 전 난생 처음으로 대학병원 1인실에 입원했습니다. 무릎을 다친 지 얼마되지 않아 입원했던 터라 제가 무릎 수술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더라고요. (무릎은 잘 나아가고 있습니다) 입원은 제가 아파서 했던 것은 아니고, 조혈모세포 기증을 위해서였습니다. 골수기증이라고도 하지요.골수기증은 15년 전인 의대 학생 시절에 신청을 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혈액종양학 수업에서 혈액암 환자들을 위한 골수이식의 중요성에 대해서 교수님께 인상적인 수업을 듣고 나오니, 골수기증등록 캠페인데스크가 의
제가 일하는 살림의원은 의료협동조합으로 주민들이 돈과 힘을 모아 함께 만들고 운영하는 곳입니다. 누구나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진료 받을 수 있는 곳이지요. 처음에 우리가 의원을 만들 때 ‘누구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기관’이어야 한다는 강한 합의가 있었습니다.그런데 사실 ‘누구나 진료 받을 수 있는 곳’은 “누구나 오세요”라고 말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오지 못하게 하는 현실적인 제약, 장벽들이 없어야지요. 그래서 장애인이 진료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 살림의원을 처음 만들 때 입지
방문진료를 나가는 댁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습니다. 한참 환자분의 상태에 대해 보호자분께 얘기를 듣고 설명과 교육을 하고 처방전도 발행하고 다시 방문진료를 나갈 날짜까지 잡았습니다.“어머니 상태는 좀 어떠세요? 공복혈당과 식후혈당도 좀 알려주세요.”“배에 가스가 너무 많이 차시는 것 같아서, 콧줄로 식사 드리는 간격을 1시간 정도 넓혀봤어요. 그랬더니 좀 더 소화를 잘 시키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식사 들어가고 나서 2시간 지나서 혈당은 170 정도 나오고요, 공복혈당은 요 며칠 안 재봐서 모르겠어요. 의식 상태는 비슷비슷하세
최근 1~2주일 이내에 유난히 대상포진에 걸린 분들이 진료실에 많이 오시네요. 대상포진은 어렸을 때 걸렸던 수두로 인해, 수두 바이러스가 몸에 잠복해 있다가 면역력이 떨어지면 몸의 특정 신경절을 따라 발진, 포진, 신경통이 나타나는 병입니다. 마치 띠를 두른 모양으로 포진이 나타난다고 하여 '대상포진(띠모양포진)'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성인이 되어 면역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우선 노화! 70대 이상의 고령자들에게 대상포진이 잘 생깁니다. 또 이분들은 대상포진 후에 신경통이 영구히 남는 경우도 있어서, 대상포진은 고령자들